단편(?) : 일상 파괴(수정)

사실은 미궁학원의 초입에 일어난 여러 사건과 인물들의 일부입니다.

병약...은 아니지만 병원 신세를 호되게 진 듯한 중학생 소녀와 끼는 있어도 딱히 할 필요가 없기에 지금까지 달려온 관성만으로 비뚤어지지 않았던 고등학생 소년이 만나서 벌이는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이야기. 일까요?



역시 보이밋걸이 좋군요.

조금 수정했습니다.















조금 더운 게 문제지만, 한 여름, 한 낮의 학교 옥상에서 이 정도의 더위정도야 양반 아니겠는가. 푸른 하늘에 펼쳐진 넓고도 세밀한 구름의 굴곡이 아주 천천히 흘러나간다. 햇살에 몸이 달아오를 즈음에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히고, 비온 후의 수분을 막 앗아간 청명한 햇살은 저 멀리의 풍경을 무리 없이 눈에 전해준다. 정말 날씨 자체는 흠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분명 무언가를 시작하고자 한다면 이런 날씨에 해야겠다 싶을 정도로 이상적인 날씨다.

“히미타의 원... 이 거야?”

“틀려, 그건 베게츠드의 문양이잖아. 어떻게 그게 원으로 보인다는 거야?”

“젠장, 내가 히미타인지 베게츠드인지 뭔지를 어떻게 구분 해? 말도 안 되는 구박하지 마.”

“...도대체 그 오망성이랑 원을 어떻게 착각하는지가 더 말이 안 된다고 보는데 말이지. 아, 거기 조심해. 잘못하면 지워지겠어.”

소녀가 주의를 주자, 소년은 일단 몸을 멈춘 후, 선을 거의 밟아 뭉갤뻔했던 운동화를 조심스럽게 이동시켰다. 소년은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소녀에게 시선을 옮겼지만, 소녀는 자신의 오른 손에 감긴 깁스를 리듬감 있게 톡톡 두드리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가 왜 저리 붕대 투성이에 깁스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소년도 잘 몰랐다. 애초부터 소년은 소녀를 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녀는 오른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그 외의 곳에도 틈틈이 붕대를 둘둘 감아두고 있었다. 입고 있는 교복은 낮이 익긴 했지만 자신과 크게 관계도 없는 곳의 것이었다. 남고 여고 외고와 여중이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이 겉보기에만 거대한 학교에서, 남고생인 소년이 다른 교복을 입은 녀석들과 연관될 일은 지금껏 없었다. 특히 여고생과 여중생과 가벼운 대화라도 하는 것이 선생님들에게 들키면 그야말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중학생이 분명할 붕대 투성이 작은 여자아이가 그런 몰골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데도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을 정도로 소년은 학교에 있어서 준법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이 곳까지 와버리게 되었다.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던 자신에게 반말을 했지만 소년은 그다지 그게 거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반말을 썼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알 수 없는 당당함이 오히려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 하자면 첫 눈에 반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쪽 눈은 붕대로 가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난 눈 하나만으로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어떤 여자아이보다도 강렬한 눈길을 보이던 소녀와의 첫 만남은 아직까지도 그다지 결손되지 않은 기억으로 소년의 뇌리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 저런 눈빛 말이다. 소년이 작업을 멈추고 소녀를 한참동안 바라보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소녀는 소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제서야 소년은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반한 여자애의 부탁을 들어주는 입장이니, 시선 정도는 자신이 받아도 좋지 않은가.

일에 다시 몰두하니 저 멀리서부터 바람에 실려오던 자동차의 소음이나 운동장의 아이들 소리가 신기하게 차단이 되었다. 이 작업은 확실히 일상의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난 이 일련의 작업들이 오늘 아침 일상에 의해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에, 계획에는 상당히 차질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아까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을 보면서, 소년은 이 비야말로 일상의 마지막 저항이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 저항은 맥없이 끝나고, 조금 축축하던 날씨는 이리도 좋아졌다. 아마도 이제 일상은 저항할 능력을 상실했다. 최종 저항은 막을 내리고, 이제 남은 것은 열린 성문으로 비일상의 군사들을 진격시켜서 일상의 성벽 안의 모든 것을 살해하는 것만 남은 것이다.

“부디 또 다시 비가 오지 말기를. 날씨 봐선 안 올 것 같지만.”

정말로 안 올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충만한데도, 소년은 소녀를 조금 놀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농을 걸었다. 그러자 소녀는 쾌청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를 갈았다.

“끔찍한 소리하지 마. 이 매직서클을 건설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고. 그 조금 내린 비 때문에 파괴된 공정이 어림잡아서 총 공정의 8%는 된다고.”

“시켜먹는 주제에 무슨 시간과 공이냐.”

소년은 자루에서 하얀 가루를 집어들어 조금씩 뿌렸다. 그리고 그 위를 고정용 스프레이를 뿌려서 마무리했다. 소녀가 준 조그마한 책자는 이미 옛날에 외워버렸지만, 일이 일인지라 다시 한번 확인 해둔다.

“아직도 안 외운 거야? 그것도 일종의 증거품이라고. 최대한 빨리 폐기처분 해야 해.”

“나는 내 머리를 신용하지 않거든.”

그리던 문양이 틀렸는지 안 틀렸는지를 확인하니, 그럭저럭 맞아떨어지는 듯 했다. 딱히 공들일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조금만 확인하면 될 것을 안 해서 틀려버리는 것도 미안하지 않겠는가. 히미타인지 뭔지 하는 그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한 줌 집어 올린다. 주변에 그려진 들쑥날쑥한 꼬챙이와 원의 중심을 선으로 연결했다.

“얼추 다 된 거지?”

소년이 구부정한 허리를 쭉 피니 척추에서 활액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우두득 우두득. 뼈 부러지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자리의 소년과 소녀는 둘 다 그 소리가 조금도 불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으음, 일단은 된 것 같아. 수고했어.”

“그럼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고. 나 배고파.”

수험생으로서 새벽부터 학교에 불린 덕분에 아침을 굶고 튀어나와, 실제 학교에서는 공부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이 일에 동원된 소년은 당연히 배가 고팠다. 그리고 그리 긴 것도 아니지만 그리 짧지도 않은 두 사람의 인연은 충분히 소년의 말을 소녀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름의 소소한 대화 끝에, 어느덧 아침 식사 정도는 소년을 무상으로 부려먹는 소녀가 사준다는 무언의 약속이 생겨났다. 보답이라고 하기는 매뉴가 좀 치명적으로 미흡하긴 했지만, 자기보다도 어린 여자아이에게 딱히 비싼 것을 얻어 먹을 생각도 없었고 소녀 역시 이 정도 성의야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지라 자연스럽게 두 사람 다 아무런 불만도 의견도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의 소녀는 조금 불만이 있는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사이에 누군가가 모처럼 건설한 매직 서클을 훼손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 어제와는 다르게 이미 이 매직 서클은 완전하게 완성되서 기동을 시작했다고. 잘못 훼손되면 수습할 수 없는 일이 터질지도 몰라.”

그렇지만 소년은 어차피 끌려와서 노동에 동원된 평범한 고교생이였다. 최근 땡땡이를 연속으로 처버리긴 했지만, 본인은 절대로 자신이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 기묘한 작업에 대해서 실무 이상의 이해를 요구하더라도 좀 곤란하다.

“그럼 굶으랴? 어차피 이제 내버려둬야 하잖아. 계속 지키고 있으면 오히려 눈에 띈다고.”

“으음, 그렇지만 지킬 건 지켜야지.”

“무슨 박카스냐.”

물론 소년도 역시 한참동안 공들인 작품이 완성단계에서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는 것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소녀가 자신에게 빵을 사주고, 그녀 역시 딸기 우유를 사서 함께 앉아 먹는 행위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특히 중간에 소년이 목이 메이다고 하면, 소녀는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이 마시던 딸기 우유를 건내주곤 했다. 행복하다면 행복한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의 소녀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니, 자신의 책가방에서 도시락을 하나 꺼내들었다. 소녀가 그 도시락을 소년에게 내민 순간, 이미 소년에게 평소에 소녀가 식사랍시고 사주던 오백원짜리 빵조각 따위는 이미 안중 밖의 일이였다.

두 사람은 그늘진 담벼락 근처에 주저앉았다. 소년은 도시락을 받아들고서 정좌했고, 소녀는 무릎을 끌어 안았다. 기대감에 가득 찬 소년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의 내용물은 소년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줄 정도로 호화스럽고 정갈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절대로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하긴 커녕, 손수 만들었음을 적당한 난이도로 홍보하는 적절한 로우 퀄러티에 오히려 감동할 지경이었다.

깁스로 동여맨 오른 팔을 빙글빙글 휘저으며 소녀가 말 했다.

“왼 손만으로 만든 거니까, 엉망진창이더라도 그냥 감수하고 먹어.”

“역시.”

소년은 젓가락을 놀리며 엉망진창인 도시락을 탐하기 시작했고, 소녀는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학교의 학생들은 물론, 이 주변의 그 누구도 아마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아주 조금 덜 평범한 시간, 아주 조금 덜 평범한 장소에서 아주 조금 덜 평범한 고등학생과 중학생 둘이서 세상을 바꿀 만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을. 물론 한 명은 다른 한명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그 한 명은 지금 잿밥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속마음이 조금 미안했는지, 소년은 거의 남의 일을 말 하는 듯이, 음식이 가득 찬 입으로 웅얼웅얼 거렸다.

“잘 되면 좋겠는데.”

“이미 잘 되었어.”

언제나처럼 허겁지겁 급하게 먹어 치우다가 과장되게 가슴을 치는 소년에게 소녀는, 언제나의 딸기 우유 대신에 보온병에 담긴 냉수를 건내주며 말 했다. 냉수를 받아든 소년은, 늘 그렇듯이 실제로는 막히지 않은 식도로 언제나와는 조금 다른 얼음물을 흘려보내었다. 언제나의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딸기우유와는 다른 차가운 냉수의 느낌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소년은 자신을 미소 띈 얼굴로 바라보는 소녀와,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완성이 되었다는 자신이 직접 그려낸 기묘한 문양들이 그려진 옥상 풍경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늘 소녀가 자신에게 건내주던 반 쯤 남은 딸기우유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by 달지않은고구마 | 2005/06/02 11:19 |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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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아스트레드 at 2005/06/02 17:11
일상이라... 일상의 단편을 써보고 싶어요. 이제 이 몸은 더럽혀져서 평범한 이야기를 쓸 수 없게 되었 OTL
Commented by 달지않은고구마 at 2005/06/02 18:37
아무도 소개문에 반문하지 않는다!
Commented by 주먹밥 at 2005/06/02 18:48
미궁학원이라면 그 뭐 온라인 그겁니까.. 친구가 재밌다고 한 것 같은데..
Commented by 달지않은고구마 at 2005/06/02 19:10
그런게 있었군요. 동명 에로게임은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Commented by 프리스티 at 2005/06/02 22:52
이런 내용이 딱 좋다니까요 (...)
Commented by 달지않은고구마 at 2005/06/02 23:17
딱 좋은 겁니까(...)

솔직히 다시 읽으니까 수정할 곳 투성이지만... 딱 좋다는 것은 역시 내용이나 분위기로군요. 참조가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지방뱀 at 2005/06/03 01:15
처음 뵙겠습니다. 가든에서 왔습니다. 보이밋걸은 역시 읽는 게 즐겁군요.
Commented by 달지않은고구마 at 2005/06/03 01:19
쓰는 것도 좋습니다.
Commented by 지방뱀 at 2005/06/03 03:36
아, 앞으로 종종 들리기 위해서 링크 신고합니다.
Commented by 주먹밥 at 2005/06/03 11:21
아 자게 잘못 안 걸지도 몰라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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