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4일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4-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1-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2-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3-
“정말 대단하긴 한데, 내 그림자 짐승을 그렇게 없애버리면 내가 가만있을 수는 없지.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내 자식 같은 놈들인데 말이야. 잘못했지? 응? 잘못했겠지?”
“자… 잘못했어요.”
겁에 질린 소녀 한 명이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를 했다. 사내는 그런 소녀에게 짐승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뭐, 괜찮아. 세상은 어차피 기브 엔 테이크잖아? 그쪽이 내 기브를 먹었으면 나는 테이크를 받아 쥐어야지. 상관없겠지?”
사내는 태생부터 남의 공포를 이용하는데에 무척이나 능숙했다. 공포는 자원이다. 사내는 남에게 비롯된 공포로 그 공포를 지닌 남에게 이적을 베풀 수 있다. 사내는 소녀들의 공포를 이용해서 그녀들의 몸을 속박시켰다. 그리고서 사내는 손을 뻗어서 한 명의 소녀를 붙잡았다. 사과하지 않은 쪽이었다. 사내의 입에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사내가 한 소녀를 잡는 동시에 다른 소녀는 재빠르게 뒤돌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내는 어딘지 배신을 당한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 아이 중에서 저쪽이 더 겁에 질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쪽을 선택한 것인데, 아까의 그 사과는 연기였단 말인가?
더군다나 보통의 소녀라면 방금과 같은 광경을 보고 난 직후에 지금과 같이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포를 이용한 신체 포박까지 행했었다. 역시 마녀는 마녀라는 걸까. 두 아이 전부 완벽하게 잡아놨다고 생각했던 사내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사내는 싹쓸이가 체질에 맞았다. 한방에 크게 저질러서 다 잡아버려야지, 미처 자잘하게 남겨버리면 꼭 실수를 하곤 했다.
“어이! 잠깐 기다려보라고. 기다리라니까?”
그 순간,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소녀가 그의 손을 물었다. 그것도 그냥 문 정도가 아닌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한 필사의 물어 뜯기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내의 손은 전혀 풀리는 기색이 없었다. 여자아이가 물어뜯는다고 해서 상처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는 격분했다.
사내의 이름은 EATER. 먹는 자. 그런 그가 다른 이의 입으로 물리다니,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는 그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은 먹는 자다. 그런데 오히려 먹히다니? 이거 정말 미치겠군! 사내는 노호성을 지르며 자신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사내의 손은 그대로 짐승의 입이 되어 잡혀 있던 소녀의 머리를 먹어 치웠다. 일순간에 변이한 그것은 손이 아닌 입이었고, 입이라기보다는 위장 그 자체였다. 핏빛으로 꿈틀거리는 고기주머니들의 집합체가 순식간에 소녀의 두개골을 쳐부수고 튀겨나오는 모든 파편을 탐욕스럽게 핥아먹었다.
본 박스 브레이크. 통칭 BBB라고 부르는, 그가 일부러 이름까지 붙여줬을 정도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능력이었다.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식욕을 호쾌하게 충족시켜주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다. 주로 노려지는 대상은 인간의 머리다. 본 박스란 두개골을 의미했다. 이 BBB는 일반적인 식사와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다. 보통의 식사에서는 뱃살이건 뇌수건 혈액이던 함께 소화시키지만, BBB로 인해 취해진 두개골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화된다. 사내는 본 박스 브레이크를 사용해서 머리를 취할수록 점차 현명해졌다.
깨끗하게 머리가 먹혀버린 소녀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멀리서 이쪽을 보면서 마술을 영창 하려던 다른 소녀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는 그대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한편, 사내는 무척이나 포만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그림자 고기를 두른 거대한 짐승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육신을 한 지금의 그에게 여자아이의 머리는 제법 든든한 식사였다. 한순간에 포만의 쾌락이 분노를 희석시켰다. 아직까지는 달아나는 소녀가 보였지만, 그는 전신을 주물러오는 쾌감 덕분에 만사가 귀찮게 느껴졌다. 배가 부른 짐승은 너그러운 법이다.
“아, 좋구나 좋아. 정말 먹는다는 것은 지고의 유희야.”
하지만 도망치던 소녀는 결국 무사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녹보석의 지팡이에 직격 당한 소녀가 마치 발로 걷어찬 깡통 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사내는 그 호쾌하고도 잔혹한 타격감에, 어쩐지 자신이 얻어맞은 것 같은 아찔함을 느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붉은 눈이었다. 지팡이의 녹색 빛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소녀의 모습은 잘 보였지만, 그 소녀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붉은 눈동자였다. 빛을 발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고양이의 그것과도 명백하게 다르지만 이상하게도 소녀의 눈은 너무나 눈에 띄었다. 그 눈은 가늘게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내는 그 덕분에 소녀의 눈동자가 조금이나마 가려져야 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불쾌했다. 저렇게나 아름다운데.
“으음, 죽인 거냐? 여자애를 때려죽이는 여자애라니. 엽기적이구만.”
사내는 그 때문에 생긴 불쾌감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소녀의 입장에서는 적반하장이겠지만, 사내의 입에선 당연하다는 듯이 비꼬는 듯한 어조가 나왔다. 하지만, 소녀는 언제나 그렇듯이 냉정했다.
“네놈만큼 엽기라는 단어를 논할 자격이 없는 존재도 없을 텐데. 일단은 목격자가 한 명이라도 필요하니까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하게 그냥 보내서 어쩌려고 그랬나? 설마 학생들이 전부 깨어나도 좋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흥, 허풍쟁이 같으니. 걱정했던 것만큼 별 볼일 있지 못했으니까 한 명 정도는 살려 보내려고 한 거다. 네 년이 심심하면 떠들던 잘난 마녀 타령을 실감해 보려고 말이야.”
“미안하지만 정보가 좀 오래된 거였다. 내가 사라지기 전과는 다르게, 지금의 윗치 스쿨은 말그대로 학교가 된 모양이야.”
소녀는 불쾌감을 억누르고는 지팡이의 보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녀가 사내에게 대하는 태도로선 실로 매우 드물게도 소극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소녀의 모습에 더욱 기고만장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도록 노력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사내는 일부러 소녀를 도발했다. 소녀는 화가 나면 눈을 크게 뜨니까 말이다. 사내는 소녀의 붉은 눈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흐흐흐. 어쩌면 내가 강한 걸지도 모르겠군. 너조차 상대를 주저하던 윗치 스쿨의 방위를, 홀로 박살내버린 이 나에 대한 태도를 조금 더 유순하게 바꿔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사내의 그런 도발을 겪는 소녀는 비웃음도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째서 이 남자는 이렇게나 아둔할까. 이리도 멍청할까. 분명, 이 남자의 ‘진화’는 엄청나게 놀라운 것이었지만, 사고능력만큼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장하지 않는 것 같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히 그녀의 계산과는 다르게 마녀들의 저항이 너무 별 볼일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충 흩어봐도 마술적으로 무장한 이는 한 명도 보이지도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윗치 스쿨이 말 그대로 평범한 학교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흑 마녀들이 아직 존재하던 당시까지만 해도 이 윗치 스쿨은 일종의 전투원을 양성하는 병영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이래서야 조금 특별한 학교 수준일지도 모른다. 소녀는 잠시 머리속의 지식을 끌어올렸다.
텔로미어에게서 받아들인 현시대의 정보를 봐도, 윗치 스쿨은 더 이상 마녀들의 본산이 아니게 된 상태였다. 지금의 본산은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으로 옮겨진 모양이다.
순간, 소녀는 사고를 정지시켰다.
“…도서관? 도서관은 분명 통째로 봉인되었을 텐데.”
소녀는 너무나 황당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넘겨버리는 자신의 생각에 당황했다. 소녀는 텔로미어의 기억을 헤집고 억지로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에 대한 지식을 꺼내들었다. 소녀가 알고 있는 도서관은 예전에 모종의 사건으로 폐쇄되어서 바다에 잠겼을 터였다.
도서관이 마그마이트의 침공으로 막 폐쇄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그 봉인 덕분에 도서관을 통해서 세계 각지에서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수많은 단체들은 무척이나 큰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수많은 장소가 고립되어서 그대로 망해버렸다.
하지만, 이곳 윗치 스쿨은 네트워크가 절단되었음에도 나름의 독자 노선을 훌륭하게 소화시켜 마녀들만의 네트워크를 부활시켰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마녀들의 교육기관이었지만 사실상의 마녀 협회에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대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마녀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견고하게 굳혀갔다.
하지만, 그것도 흑 마녀들이 사라지기 전까지였던 모양이다. 텔로미어에게서 받아낸 기억에 의하면 흑 마녀들이 완전히 멸망한 후, 남은 백 마녀들은 체계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서 다시 회복된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으로 협회의 본산을 옮긴 모양이다. 그 덕분에 윗치 스쿨은 원래대로의 교육기관으로 되돌아온 듯했다. 기억의 정리를 시간에 맡기지 않고 억지로 끌어내려니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지금의 소녀에겐 한시라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그 사이에 도서관이 다시 부활한 건가. 윗치 스쿨의 방호가 허약했던 것도 그럭저럭 이해가 돼….”
“이봐,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거야?”
“닥쳐.”
소녀는 이렇게 중요한 일을 일말의 언급도 안 했던 사내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이 격하게 피어났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 사내는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녀석이었다. 알지도 못하고 알더라도 관심도 없어서 말을 안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일단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누르기로 했다. 화를 내는 것보다는 머릿속의 정보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 급했다.
소녀는 피와 고기파편이 난자한 주변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사내의 BBB에 의해 머리가 깨끗하게 날아가 버린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후유. 어차피 그렇게 빌지 않아도, 잠시 후면 네놈이 너무 서둘러서 일을 벌인 탓에 좀 더 그럴싸한 녀석들이 몰려오게 될 거다. 나는 분명히 조금 기다렸다가 시작하라고 했을 텐데.”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옷을 벗었다. 그렇게 그녀가 지닌 이질적인 분위기를 반감시키던 평범한 복장을 대충 벗어서 내 던졌다. 어이없게도 소녀는 그 옷을 알몸 위에 입고 있었다. 그렇게 달빛 아래에 자신의 맨몸을 드러낸 소녀는 목 없는 시체가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겼다.
하나는 목이 없었지만, 그렇게 두 명의 소녀가 달빛 아래에서 나신이 되어 갔다. 사내 또한 아직 옷을 안 입었으므로 달빛 아래에 세 사람이 벌거벗게 된 셈이다. 하지만, 성적인 긴장감보다는 주변의 초토화된 배경과 아울러서 기괴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추함도, 아름다움도 없었다. 그저 기괴할 뿐.
그렇게 해서 목이 날아간 시체의 교복을 벗겨 챙기는 소녀에게 사내가 말했다.
“뭐야, 교복이 입고 싶은 거였어? 그럴 거면 애초부터 나한테 왜 옷을 구해 오라고 그랬던 거야? 저래 보여도 저 옷은 꽤 힘들게 구해온 좋은 옷이라구!”
사내는 안타까워하며 소녀가 벗어던진 옷들을 황급하게 주워들고서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내에게 그 옷은 처음 탄 월급으로 산 부모님의 붉은 속옷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것은 소녀에 전혀 알 바가 아니었다.
“이 윗치 스쿨의 교복은 보통의 옷과 비교하자면 마술적인 전투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아마 네놈이 만일 짐승이 아닌, 마술사였다면 이 옷들만으로도 엄청나게 애를 썼을 테지. 이 정도로 수준 높은 항마력을 지닌 의복도 드무니까 말이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이 정도의 심미안은 갖춰두는 편이 이롭지 않을까?”
“거 참 우습군. 너라면 상대가 누구든지, 피차 뭘 입었던 뭘 들었든 간에 아무거나 다 손쉽게 박살을 낼 수 있을 텐데 뭐하러 그렇게 최대한으로 몸을 사리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옛 동족은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건가? 동족 없는 나로선 쓸데없는 짓으로밖에 안 보이는 생각이야.”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쩐지 그냥 입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만이라도 있나?”
소녀는 천천히 옷을 입으며 말했다. 사내는 소녀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그때 처음 봤다. 언제나 욕망 투성이고, 그 욕망을 보이고 충족시키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내에 비해,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사내는 순간적으로 큰 위화감을 느꼈다.
“…입고 싶었을 뿐이라고?”
사내는 웃고 있었다. 눈앞의 소녀에게도 욕망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왜 이리 기쁜지, 사내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소녀는 응답하지 않은 채 작업을 계속했다.
소녀는 그렇게 조금 헤매면서도, 속옷부터 신발까지 악착같이 벗겨서 윗치 스쿨의 교복을 완전히 입고야 말았다. 덕분에 머리 잃은 시신은 옷까지 빼앗겨서 더더욱 측은하고도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에 반해 소녀는, 그녀의 몸에 비해 옷의 크기가 조금 큰 탓에 전반적으로 헐렁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다소 길게 내려온 스커트가 냉정한 소녀의 이미지에 잘 어울렸다. 손목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소매를 붙잡는 손가락이 깜찍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목 부분에 피가 좀 튀어있다는 것 정도일까. 소녀도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손으로 목의 옷깃을 슥슥 손질했다.
그렇게 윗치 스쿨의 교복을 갖춰 입고 난 소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을 느꼈다. 소녀는 한동안 사내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금 어색한 태도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혹시 안 어울리나? 역시 조금 주책이었나. 흠.”
소녀는 붉은 눈동자를 내리뜨고는 바닥의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사내는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소녀가 지팡이를 들어올려서 다시 녹색 불빛이 주변을 비추기 시작했지만, 사내는 여전히 소녀를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소녀는 방금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다시 그녀 고유의 불타는 얼음과 같은 불쾌감을 띄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잠잠해진 불꽃이 다시 타오르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사내는 그런 소녀의 태도를 다시 부숴버릴 정도로 격렬하게,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외쳤다.
“아아, 그렇지!”
“뭐가 그렇다는 건가?”
“그래. 이건 약탈이군! 이야, 갑자기 네가 이전보다 훨씬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걸. 역시 승자가 전리품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지당하지. 자자, 어차피 지금의 나는 너의 개다. 나의 승리는 너의 승리다.”
소녀는 이를 으깨듯이 깨물며 말했다.
“허, 네놈과 같은 취급하지 마라.”
“아니 뭘 그리 부끄러워하시나. 으하하하하하! 그건 좋은 거라고! 그 옷 말고도 다른 건 어떨까? 아직도 많이 있어. 어차피 승리와 약탈은 서로 때려야 땔 수 없는 사이지!”
사내는 어느덧 소녀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에 손까지 올리고 몸을 밀착하며 친한 척을 해대기 시작했다. 물론, 사내는 아직도 알몸이었다. 전신이 흉물스러운 근육으로 덮인 거구의 사내가, 작은 교복차림의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치근덕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밝은 달빛 아래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잠시 후, 폭음이 울려 퍼졌다. 소녀는 쓰러진 사내에게 등을 돌리고서 말했다.
“몸으로 직접 뛰는 네놈에게는 미안하지만, 만일 마녀들의 본대가 오게 될 경우 나는 학생을 연기해서라도 숨겨야 한다. 이 경우에는 넌 혼자서 자력으로 달아나도록.”
“흠, 약탈이건 아니건, 나와 같건 다르건 간에 그 덕분에 뭐 좋은 구경도 했으니 불만은 없다. 옷 약탈은 자주 좀 하라고. 될 수 있으면 나 있을 때.”
사내는 조금 그슬려진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소녀는 다시 지팡이를 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미가 없다는 느낌에 그냥 포기해버렸다. 확실히 이 사내에겐 개 정도의 사나움과 유순함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여차하면 자신을 버리는 패로 쓰겠다는 소녀의 말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론 소녀에게 복종하는 셈이었다. 소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 그렇지.”
한숨을 쉬던 소녀는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사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너 혹시, 녹티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소녀의 어조는 확신을 담고 있지 않았다. 남의 기억을 흡수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단편적인 정보만을 빨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정도가 고작이다. 더군다나 소녀는 방금, 도서관에 대한 기억을 강제로 끌어올린 직후였다. 한동안 텔로미어의 기억에는 의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봤던 것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사내는 쾌활하게 긍정했다.
“녹티스라면 그 소드 윗치 말인가. 물론 알다마다.”
“소드 윗치?”
“그래. 그 이상하게 빛나는 칼을 휘두르는 어린 마녀… 너랑 엄청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지.”
“비슷하다고?”
“뭐, 사실 내가 보기엔 인간들은 거의 구분이 안 가긴 하지만, 그래도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검고 피부가 허연 계집애는 그다지 흔하지 않지. 난 색맹은 아니라고.”
소녀는 덤덤하게 계속 질문을 했다.
“어떤 여자지?”
“헹, 여자라고 하기엔 젖비린내가 심한 꼬맹이지. 너처럼.”
소녀는 그다지 불쾌해 하지 않았다. 사내의 말은 사실이니까. 지금 소녀의 외모는, 소녀 자신이 보기에도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녹티스라. 대체 그게 누구일까? 어째서 지금의 자신은 그 녹티스라는 계집애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소녀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것뿐이었다. 아까 받아낸 텔로미어의 기억이 소녀의 뇌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꼬맹이… 소녀인 건가. 매우 젊군.”
“그래. 그러고 보니 지금의 너는 그 녀석이랑 엄청나게 비슷한데? 그 계집애도 허구헌날 바로 그 교복을 입고 있었다고. 단 한 번도 다른 옷을 입은 것은 본 적이 없어. 전에는 그저 이쁘장한 교복차림의 조그만 계집애라고 얕잡아보다가 오히려 이쪽이 죽을 뻔했었다. ‘윗치’ 스쿨이라고 소드 ‘윗치’같은 계집애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확실히 무서웠을 거야.”
“그런가, 윗치 스쿨의 교복을 즐겨 입는 거였나.”
소녀는 자신이 입은 교복의 앞섬을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소녀의 마음은 무척이나 차가워졌다. 그러고 보니, 난데없이 자신은 이 교복을 왜 입고 싶어졌던 것일까.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입는 옷에 신경을 쓴 기억은 없는데. 그럴 것이었는데.
“지금의 네 교복이 좀 더 네 체형에 딱 맞고, 치마가 좀 짧고, 머리를 묶고,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고 있으면 거의 그 모양이 되겠군. 냄새나 기척은 전혀 다르지만… 혹시 너, 그 녀석이랑 아는 사이였어? …얼레, 어디 가? 이봐!”
소녀는 스쿨 본관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소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커다란 그녀의 지팡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녹색 조명이, 소녀가 걸어갈 때마다 휘청휘청 흔들렸다. 그 덕분에 등 아래까지 내려온 검고 긴 머리카락이 어두운 배경과 하나가 되어 물결처럼 보였다.
“어이. 이봐. 사람이 말하는 도중에 그렇게 가 버려도 되는 거야? 잠깐 기다려!”
사내는 이를 갈면서도 그녀를 뒤따라서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소녀가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지팡이를 피하며 되돌아왔다.
“인간의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옷을 입어라, 이 짐승놈!”
“으음, 어쩐지 좀 시원하더라. 캬하하.”
사내는 벗어둔 자신의 옷을 집어들고는 다시 달렸다. 방금의 장면을 객관적으로 봤다면 교복차림의 소녀를 벌거벗은 괴한이 추적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에게 소녀의 추가적인 명령이 이어졌다.
“닥치고 지팡이도 물어와. 그리고 다 입기 전에는 내게 다가오지 마.”
“…내가 개냐.”
그러면서도 다시 되돌아가서 소녀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물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확실히 유순한 개 그 자체였다. 사내는 그 커다란 지팡이를 입에 물고서 손으론 옷을 입으며, 다리로는 달렸다. 그것은 돈을 주고 봐도 아깝지 않을 묘기였다. 그런 사내에게 소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2-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3-
“정말 대단하긴 한데, 내 그림자 짐승을 그렇게 없애버리면 내가 가만있을 수는 없지.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내 자식 같은 놈들인데 말이야. 잘못했지? 응? 잘못했겠지?”
“자… 잘못했어요.”
겁에 질린 소녀 한 명이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를 했다. 사내는 그런 소녀에게 짐승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뭐, 괜찮아. 세상은 어차피 기브 엔 테이크잖아? 그쪽이 내 기브를 먹었으면 나는 테이크를 받아 쥐어야지. 상관없겠지?”
사내는 태생부터 남의 공포를 이용하는데에 무척이나 능숙했다. 공포는 자원이다. 사내는 남에게 비롯된 공포로 그 공포를 지닌 남에게 이적을 베풀 수 있다. 사내는 소녀들의 공포를 이용해서 그녀들의 몸을 속박시켰다. 그리고서 사내는 손을 뻗어서 한 명의 소녀를 붙잡았다. 사과하지 않은 쪽이었다. 사내의 입에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사내가 한 소녀를 잡는 동시에 다른 소녀는 재빠르게 뒤돌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내는 어딘지 배신을 당한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 아이 중에서 저쪽이 더 겁에 질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쪽을 선택한 것인데, 아까의 그 사과는 연기였단 말인가?
더군다나 보통의 소녀라면 방금과 같은 광경을 보고 난 직후에 지금과 같이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포를 이용한 신체 포박까지 행했었다. 역시 마녀는 마녀라는 걸까. 두 아이 전부 완벽하게 잡아놨다고 생각했던 사내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사내는 싹쓸이가 체질에 맞았다. 한방에 크게 저질러서 다 잡아버려야지, 미처 자잘하게 남겨버리면 꼭 실수를 하곤 했다.
“어이! 잠깐 기다려보라고. 기다리라니까?”
그 순간,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소녀가 그의 손을 물었다. 그것도 그냥 문 정도가 아닌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한 필사의 물어 뜯기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내의 손은 전혀 풀리는 기색이 없었다. 여자아이가 물어뜯는다고 해서 상처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는 격분했다.
사내의 이름은 EATER. 먹는 자. 그런 그가 다른 이의 입으로 물리다니,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는 그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은 먹는 자다. 그런데 오히려 먹히다니? 이거 정말 미치겠군! 사내는 노호성을 지르며 자신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사내의 손은 그대로 짐승의 입이 되어 잡혀 있던 소녀의 머리를 먹어 치웠다. 일순간에 변이한 그것은 손이 아닌 입이었고, 입이라기보다는 위장 그 자체였다. 핏빛으로 꿈틀거리는 고기주머니들의 집합체가 순식간에 소녀의 두개골을 쳐부수고 튀겨나오는 모든 파편을 탐욕스럽게 핥아먹었다.
본 박스 브레이크. 통칭 BBB라고 부르는, 그가 일부러 이름까지 붙여줬을 정도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능력이었다.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식욕을 호쾌하게 충족시켜주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다. 주로 노려지는 대상은 인간의 머리다. 본 박스란 두개골을 의미했다. 이 BBB는 일반적인 식사와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다. 보통의 식사에서는 뱃살이건 뇌수건 혈액이던 함께 소화시키지만, BBB로 인해 취해진 두개골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화된다. 사내는 본 박스 브레이크를 사용해서 머리를 취할수록 점차 현명해졌다.
깨끗하게 머리가 먹혀버린 소녀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멀리서 이쪽을 보면서 마술을 영창 하려던 다른 소녀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는 그대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한편, 사내는 무척이나 포만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그림자 고기를 두른 거대한 짐승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육신을 한 지금의 그에게 여자아이의 머리는 제법 든든한 식사였다. 한순간에 포만의 쾌락이 분노를 희석시켰다. 아직까지는 달아나는 소녀가 보였지만, 그는 전신을 주물러오는 쾌감 덕분에 만사가 귀찮게 느껴졌다. 배가 부른 짐승은 너그러운 법이다.
“아, 좋구나 좋아. 정말 먹는다는 것은 지고의 유희야.”
하지만 도망치던 소녀는 결국 무사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녹보석의 지팡이에 직격 당한 소녀가 마치 발로 걷어찬 깡통 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사내는 그 호쾌하고도 잔혹한 타격감에, 어쩐지 자신이 얻어맞은 것 같은 아찔함을 느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붉은 눈이었다. 지팡이의 녹색 빛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소녀의 모습은 잘 보였지만, 그 소녀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붉은 눈동자였다. 빛을 발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고양이의 그것과도 명백하게 다르지만 이상하게도 소녀의 눈은 너무나 눈에 띄었다. 그 눈은 가늘게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내는 그 덕분에 소녀의 눈동자가 조금이나마 가려져야 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불쾌했다. 저렇게나 아름다운데.
“으음, 죽인 거냐? 여자애를 때려죽이는 여자애라니. 엽기적이구만.”
사내는 그 때문에 생긴 불쾌감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소녀의 입장에서는 적반하장이겠지만, 사내의 입에선 당연하다는 듯이 비꼬는 듯한 어조가 나왔다. 하지만, 소녀는 언제나 그렇듯이 냉정했다.
“네놈만큼 엽기라는 단어를 논할 자격이 없는 존재도 없을 텐데. 일단은 목격자가 한 명이라도 필요하니까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하게 그냥 보내서 어쩌려고 그랬나? 설마 학생들이 전부 깨어나도 좋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흥, 허풍쟁이 같으니. 걱정했던 것만큼 별 볼일 있지 못했으니까 한 명 정도는 살려 보내려고 한 거다. 네 년이 심심하면 떠들던 잘난 마녀 타령을 실감해 보려고 말이야.”
“미안하지만 정보가 좀 오래된 거였다. 내가 사라지기 전과는 다르게, 지금의 윗치 스쿨은 말그대로 학교가 된 모양이야.”
소녀는 불쾌감을 억누르고는 지팡이의 보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녀가 사내에게 대하는 태도로선 실로 매우 드물게도 소극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소녀의 모습에 더욱 기고만장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도록 노력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사내는 일부러 소녀를 도발했다. 소녀는 화가 나면 눈을 크게 뜨니까 말이다. 사내는 소녀의 붉은 눈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흐흐흐. 어쩌면 내가 강한 걸지도 모르겠군. 너조차 상대를 주저하던 윗치 스쿨의 방위를, 홀로 박살내버린 이 나에 대한 태도를 조금 더 유순하게 바꿔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사내의 그런 도발을 겪는 소녀는 비웃음도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째서 이 남자는 이렇게나 아둔할까. 이리도 멍청할까. 분명, 이 남자의 ‘진화’는 엄청나게 놀라운 것이었지만, 사고능력만큼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장하지 않는 것 같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히 그녀의 계산과는 다르게 마녀들의 저항이 너무 별 볼일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충 흩어봐도 마술적으로 무장한 이는 한 명도 보이지도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윗치 스쿨이 말 그대로 평범한 학교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흑 마녀들이 아직 존재하던 당시까지만 해도 이 윗치 스쿨은 일종의 전투원을 양성하는 병영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이래서야 조금 특별한 학교 수준일지도 모른다. 소녀는 잠시 머리속의 지식을 끌어올렸다.
텔로미어에게서 받아들인 현시대의 정보를 봐도, 윗치 스쿨은 더 이상 마녀들의 본산이 아니게 된 상태였다. 지금의 본산은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으로 옮겨진 모양이다.
순간, 소녀는 사고를 정지시켰다.
“…도서관? 도서관은 분명 통째로 봉인되었을 텐데.”
소녀는 너무나 황당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넘겨버리는 자신의 생각에 당황했다. 소녀는 텔로미어의 기억을 헤집고 억지로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에 대한 지식을 꺼내들었다. 소녀가 알고 있는 도서관은 예전에 모종의 사건으로 폐쇄되어서 바다에 잠겼을 터였다.
도서관이 마그마이트의 침공으로 막 폐쇄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그 봉인 덕분에 도서관을 통해서 세계 각지에서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수많은 단체들은 무척이나 큰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수많은 장소가 고립되어서 그대로 망해버렸다.
하지만, 이곳 윗치 스쿨은 네트워크가 절단되었음에도 나름의 독자 노선을 훌륭하게 소화시켜 마녀들만의 네트워크를 부활시켰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마녀들의 교육기관이었지만 사실상의 마녀 협회에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대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마녀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견고하게 굳혀갔다.
하지만, 그것도 흑 마녀들이 사라지기 전까지였던 모양이다. 텔로미어에게서 받아낸 기억에 의하면 흑 마녀들이 완전히 멸망한 후, 남은 백 마녀들은 체계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서 다시 회복된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으로 협회의 본산을 옮긴 모양이다. 그 덕분에 윗치 스쿨은 원래대로의 교육기관으로 되돌아온 듯했다. 기억의 정리를 시간에 맡기지 않고 억지로 끌어내려니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지금의 소녀에겐 한시라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그 사이에 도서관이 다시 부활한 건가. 윗치 스쿨의 방호가 허약했던 것도 그럭저럭 이해가 돼….”
“이봐,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거야?”
“닥쳐.”
소녀는 이렇게 중요한 일을 일말의 언급도 안 했던 사내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이 격하게 피어났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 사내는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녀석이었다. 알지도 못하고 알더라도 관심도 없어서 말을 안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일단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누르기로 했다. 화를 내는 것보다는 머릿속의 정보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 급했다.
소녀는 피와 고기파편이 난자한 주변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사내의 BBB에 의해 머리가 깨끗하게 날아가 버린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후유. 어차피 그렇게 빌지 않아도, 잠시 후면 네놈이 너무 서둘러서 일을 벌인 탓에 좀 더 그럴싸한 녀석들이 몰려오게 될 거다. 나는 분명히 조금 기다렸다가 시작하라고 했을 텐데.”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옷을 벗었다. 그렇게 그녀가 지닌 이질적인 분위기를 반감시키던 평범한 복장을 대충 벗어서 내 던졌다. 어이없게도 소녀는 그 옷을 알몸 위에 입고 있었다. 그렇게 달빛 아래에 자신의 맨몸을 드러낸 소녀는 목 없는 시체가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겼다.
하나는 목이 없었지만, 그렇게 두 명의 소녀가 달빛 아래에서 나신이 되어 갔다. 사내 또한 아직 옷을 안 입었으므로 달빛 아래에 세 사람이 벌거벗게 된 셈이다. 하지만, 성적인 긴장감보다는 주변의 초토화된 배경과 아울러서 기괴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추함도, 아름다움도 없었다. 그저 기괴할 뿐.
그렇게 해서 목이 날아간 시체의 교복을 벗겨 챙기는 소녀에게 사내가 말했다.
“뭐야, 교복이 입고 싶은 거였어? 그럴 거면 애초부터 나한테 왜 옷을 구해 오라고 그랬던 거야? 저래 보여도 저 옷은 꽤 힘들게 구해온 좋은 옷이라구!”
사내는 안타까워하며 소녀가 벗어던진 옷들을 황급하게 주워들고서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내에게 그 옷은 처음 탄 월급으로 산 부모님의 붉은 속옷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것은 소녀에 전혀 알 바가 아니었다.
“이 윗치 스쿨의 교복은 보통의 옷과 비교하자면 마술적인 전투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아마 네놈이 만일 짐승이 아닌, 마술사였다면 이 옷들만으로도 엄청나게 애를 썼을 테지. 이 정도로 수준 높은 항마력을 지닌 의복도 드무니까 말이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이 정도의 심미안은 갖춰두는 편이 이롭지 않을까?”
“거 참 우습군. 너라면 상대가 누구든지, 피차 뭘 입었던 뭘 들었든 간에 아무거나 다 손쉽게 박살을 낼 수 있을 텐데 뭐하러 그렇게 최대한으로 몸을 사리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옛 동족은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건가? 동족 없는 나로선 쓸데없는 짓으로밖에 안 보이는 생각이야.”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쩐지 그냥 입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만이라도 있나?”
소녀는 천천히 옷을 입으며 말했다. 사내는 소녀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그때 처음 봤다. 언제나 욕망 투성이고, 그 욕망을 보이고 충족시키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내에 비해,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사내는 순간적으로 큰 위화감을 느꼈다.
“…입고 싶었을 뿐이라고?”
사내는 웃고 있었다. 눈앞의 소녀에게도 욕망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왜 이리 기쁜지, 사내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소녀는 응답하지 않은 채 작업을 계속했다.
소녀는 그렇게 조금 헤매면서도, 속옷부터 신발까지 악착같이 벗겨서 윗치 스쿨의 교복을 완전히 입고야 말았다. 덕분에 머리 잃은 시신은 옷까지 빼앗겨서 더더욱 측은하고도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에 반해 소녀는, 그녀의 몸에 비해 옷의 크기가 조금 큰 탓에 전반적으로 헐렁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다소 길게 내려온 스커트가 냉정한 소녀의 이미지에 잘 어울렸다. 손목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소매를 붙잡는 손가락이 깜찍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목 부분에 피가 좀 튀어있다는 것 정도일까. 소녀도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손으로 목의 옷깃을 슥슥 손질했다.
그렇게 윗치 스쿨의 교복을 갖춰 입고 난 소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을 느꼈다. 소녀는 한동안 사내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금 어색한 태도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혹시 안 어울리나? 역시 조금 주책이었나. 흠.”
소녀는 붉은 눈동자를 내리뜨고는 바닥의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사내는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소녀가 지팡이를 들어올려서 다시 녹색 불빛이 주변을 비추기 시작했지만, 사내는 여전히 소녀를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소녀는 방금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다시 그녀 고유의 불타는 얼음과 같은 불쾌감을 띄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잠잠해진 불꽃이 다시 타오르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사내는 그런 소녀의 태도를 다시 부숴버릴 정도로 격렬하게,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외쳤다.
“아아, 그렇지!”
“뭐가 그렇다는 건가?”
“그래. 이건 약탈이군! 이야, 갑자기 네가 이전보다 훨씬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걸. 역시 승자가 전리품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지당하지. 자자, 어차피 지금의 나는 너의 개다. 나의 승리는 너의 승리다.”
소녀는 이를 으깨듯이 깨물며 말했다.
“허, 네놈과 같은 취급하지 마라.”
“아니 뭘 그리 부끄러워하시나. 으하하하하하! 그건 좋은 거라고! 그 옷 말고도 다른 건 어떨까? 아직도 많이 있어. 어차피 승리와 약탈은 서로 때려야 땔 수 없는 사이지!”
사내는 어느덧 소녀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에 손까지 올리고 몸을 밀착하며 친한 척을 해대기 시작했다. 물론, 사내는 아직도 알몸이었다. 전신이 흉물스러운 근육으로 덮인 거구의 사내가, 작은 교복차림의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치근덕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밝은 달빛 아래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잠시 후, 폭음이 울려 퍼졌다. 소녀는 쓰러진 사내에게 등을 돌리고서 말했다.
“몸으로 직접 뛰는 네놈에게는 미안하지만, 만일 마녀들의 본대가 오게 될 경우 나는 학생을 연기해서라도 숨겨야 한다. 이 경우에는 넌 혼자서 자력으로 달아나도록.”
“흠, 약탈이건 아니건, 나와 같건 다르건 간에 그 덕분에 뭐 좋은 구경도 했으니 불만은 없다. 옷 약탈은 자주 좀 하라고. 될 수 있으면 나 있을 때.”
사내는 조금 그슬려진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소녀는 다시 지팡이를 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미가 없다는 느낌에 그냥 포기해버렸다. 확실히 이 사내에겐 개 정도의 사나움과 유순함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여차하면 자신을 버리는 패로 쓰겠다는 소녀의 말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론 소녀에게 복종하는 셈이었다. 소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 그렇지.”
한숨을 쉬던 소녀는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사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너 혹시, 녹티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소녀의 어조는 확신을 담고 있지 않았다. 남의 기억을 흡수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단편적인 정보만을 빨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정도가 고작이다. 더군다나 소녀는 방금, 도서관에 대한 기억을 강제로 끌어올린 직후였다. 한동안 텔로미어의 기억에는 의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봤던 것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사내는 쾌활하게 긍정했다.
“녹티스라면 그 소드 윗치 말인가. 물론 알다마다.”
“소드 윗치?”
“그래. 그 이상하게 빛나는 칼을 휘두르는 어린 마녀… 너랑 엄청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지.”
“비슷하다고?”
“뭐, 사실 내가 보기엔 인간들은 거의 구분이 안 가긴 하지만, 그래도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검고 피부가 허연 계집애는 그다지 흔하지 않지. 난 색맹은 아니라고.”
소녀는 덤덤하게 계속 질문을 했다.
“어떤 여자지?”
“헹, 여자라고 하기엔 젖비린내가 심한 꼬맹이지. 너처럼.”
소녀는 그다지 불쾌해 하지 않았다. 사내의 말은 사실이니까. 지금 소녀의 외모는, 소녀 자신이 보기에도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녹티스라. 대체 그게 누구일까? 어째서 지금의 자신은 그 녹티스라는 계집애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소녀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것뿐이었다. 아까 받아낸 텔로미어의 기억이 소녀의 뇌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꼬맹이… 소녀인 건가. 매우 젊군.”
“그래. 그러고 보니 지금의 너는 그 녀석이랑 엄청나게 비슷한데? 그 계집애도 허구헌날 바로 그 교복을 입고 있었다고. 단 한 번도 다른 옷을 입은 것은 본 적이 없어. 전에는 그저 이쁘장한 교복차림의 조그만 계집애라고 얕잡아보다가 오히려 이쪽이 죽을 뻔했었다. ‘윗치’ 스쿨이라고 소드 ‘윗치’같은 계집애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확실히 무서웠을 거야.”
“그런가, 윗치 스쿨의 교복을 즐겨 입는 거였나.”
소녀는 자신이 입은 교복의 앞섬을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소녀의 마음은 무척이나 차가워졌다. 그러고 보니, 난데없이 자신은 이 교복을 왜 입고 싶어졌던 것일까.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입는 옷에 신경을 쓴 기억은 없는데. 그럴 것이었는데.
“지금의 네 교복이 좀 더 네 체형에 딱 맞고, 치마가 좀 짧고, 머리를 묶고,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고 있으면 거의 그 모양이 되겠군. 냄새나 기척은 전혀 다르지만… 혹시 너, 그 녀석이랑 아는 사이였어? …얼레, 어디 가? 이봐!”
소녀는 스쿨 본관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소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커다란 그녀의 지팡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녹색 조명이, 소녀가 걸어갈 때마다 휘청휘청 흔들렸다. 그 덕분에 등 아래까지 내려온 검고 긴 머리카락이 어두운 배경과 하나가 되어 물결처럼 보였다.
“어이. 이봐. 사람이 말하는 도중에 그렇게 가 버려도 되는 거야? 잠깐 기다려!”
사내는 이를 갈면서도 그녀를 뒤따라서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소녀가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지팡이를 피하며 되돌아왔다.
“인간의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옷을 입어라, 이 짐승놈!”
“으음, 어쩐지 좀 시원하더라. 캬하하.”
사내는 벗어둔 자신의 옷을 집어들고는 다시 달렸다. 방금의 장면을 객관적으로 봤다면 교복차림의 소녀를 벌거벗은 괴한이 추적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에게 소녀의 추가적인 명령이 이어졌다.
“닥치고 지팡이도 물어와. 그리고 다 입기 전에는 내게 다가오지 마.”
“…내가 개냐.”
그러면서도 다시 되돌아가서 소녀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물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확실히 유순한 개 그 자체였다. 사내는 그 커다란 지팡이를 입에 물고서 손으론 옷을 입으며, 다리로는 달렸다. 그것은 돈을 주고 봐도 아깝지 않을 묘기였다. 그런 사내에게 소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 by | 2005/12/24 13:03 | 글 | 트랙백 | 덧글(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아, 중간에 하지만 이 나올 때 말줄임표를 쉼표 세 개로 찍으신 것, 의도하신 건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