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4일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5-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1-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2-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3-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4-
윗치 스쿨 본관의 지하실. 이곳에는 그동안 마녀들이 모아둔 지식과 수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은 그중에서도 텔로미어가 직접 관리하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지팡이를 강하게 쥐었다. 이 지팡이는 마녀라는 종의 수명을 상징하는 텔로미어의 증표이자, 먼 과거에는 자신의 것이었던 물건이었다. 비밀 창고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녀는 예전에 그 비밀창고를 직접 관리했던 적도 있었다. 장소를 모를 리가 없었다. 거침없이 전진하는 소녀의 뒤를 사내가 성큼성큼 따랐다. 잠시 후 멈춰 선 소녀가 앞의 벽을 막고 있는 석판을 지팡이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석판을 치워.”
“직접 해도 될 것을, 꼭 부려 먹는구만.”
“치워.”
“알았다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헐렁한 교복과, 몸에 비해서 지나치게 길고 커다란 자매의 유산을 지닌 소녀의 모습은 초반에 비해서 조금 더 애교가 있었지만, 역시 그 내용물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냉정한 소녀의 시선에 사내는 투덜거리며 거대한 석판을 치웠다. 그 거대한 석판은 있던 자리에서 치워지자마자 어딘가로 사라졌다. 석판 너머에는 아무런 조명도 없는 긴 통로가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망설임도 없이 통로로 들어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그들은 윗치스쿨 내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봉인 비고에 도착했다.
그 입구는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거대했다. 그야말로 문으로 사용되기엔 어리석은 스케일을 자랑했다. 웅장하다는 말보다는, 바보스럽다는 말이 차라리 어울렸다. 분명 석판 뒤의 통로는 그다지 넓지 않았건만, 어느 사이에 이렇게 넓어져서 이리 거대한 문이 존재하는 곳까지 오게 된 걸까.
하지만, 소녀는 한 줌의 동요도 없이 녹보석의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서서히 지팡이의 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지팡이에서 뿜어지는 빛과 함께, 서서히 문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어둠으로 가득 찬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조그마한 소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 의해 밝아지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함이 있었다. 녹색 빛에 의해 사방에서 생겨난 그림자가 흔들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성화에 던져진 마귀와 같았다. 공명이 점차 빨라지고,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야수처럼 우렁차게 울부짖기 시작한 거대한 철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자신의 거체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 웅장한 모습에 감탄했다.
“아, 그 지팡이. 그래서 가져 온 거로군. 이거 대단한데.”
소녀는 그런 사내를 무시하고서 문이 거의 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안으로 슬쩍 들어섰다. 사내는 투덜거리며 아직 통과하기엔 좁은 틈으로 자신의 커다란 몸을 밀어넣으려 했지만, 문은 소녀가 들어가버리자 더는 열리지 않았다. 사내는 입술을 내밀며 문틈의 옆에 무릎을 안고서 쪼그려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문밖의 사내야 우울하건 외롭건 간에, 소녀는 작은 박물관처럼 꾸며진 조그만 방으로 들어섰다. 이곳이야말로 텔로미어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텔로미어조차 내부의 물품을 사사로이 할 수 없는 윗치 스쿨의 금역중의 금역이었다. 분명 작은 곳이지만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다른 물건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만드라고라… 여기인가.”
그곳에는 석판이 깔린 돌 바닥들 중 일부가 벗겨져서 화단을 이루고 있었다. 바닥이 제거된 부분은 축축한 검은 흙이 깔려 있었고, 거기에는 녹색의 잎사귀가 살짝 자신의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풀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땅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섭다면 충분히 무서운 상황이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한가로워서 듣는 사람의 맥을 뽑았다.
-아야야야… 아파요.
하지만 소녀는 땅속의 호소를 무시하고, 에누리없이 예의 그 무표정으로 풀줄기를 붙잡고 꽉 꽉 잡아당겼다. 잠깐의 소란(고통스러운 비명)이 있은 후, 땅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뽑아주나 두근두근 거리면서 ‘얼른 뽑아 줘~ 뽑으면 신나게 비명을 지를 테야~’ 하고 기다린 지 수백 년이 지났어요. 그런데 이제야 새삼스럽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이유가 뭐죠?
“내 마음이다.”
-뭐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생긴 녀석이기에 이렇게나 무례한 소리를 해 대는지 얼굴이나 좀 봐요!
“좋을 대로 해라. 알아서 나와준다니 나야 사양할 것 없구나.”
-으읔,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땅속에 있어서 몸이….
“얼른 나오지 않으면 어린아이가 무력한 식물에게 얼마나 잔혹해 질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
그 소리를 듣자, 구시렁거리던 땅속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밖에서 한창 조용하던 사내의 폭소가 들려왔지만, 소녀는 무시하고 얼굴을 다른 쪽으로 향했다.
소녀는 눈을 감고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말하자면 보물의 산이었다. 소녀의 눈이 저 한구석에 안치된 네크로노미콘이라는 검은 표지의 책에 잠시 머물렀지만, 이내 흥미를 잃었다.
“네크로노미콘… 영장의 감옥인가. 지금의 나에겐 필요 없겠지.”
소녀는 다시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눈알 하나가 떠 있는 조그마한 수조를 봤다. 그 눈알은 물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액체에 둥둥 떠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마주 노려봐주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시선을 돌린 눈알을 따라가서 다시 눈을 마주쳤지만, 그 눈알은 계속해서 소녀를 외면했다. 한참을 빙글빙글 돌며 시간을 보내던 소녀는 결국 질린 듯했다. 수조 안에 담긴 주제에 그 눈알은 울먹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 소녀의 눈길이 머문 곳에는 조금 특별한 물건이 있었다. 그곳에는 한 자루의 짧은 검이 있었다. 마술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 쇠사슬로 둘둘 묶여있었지만, 소녀는 그 쇠사슬 곳곳에 퍼져있는 균열을 볼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봉인이 한번 풀렸던 건가. 어디에 쓰인 거지?”
뭐, 어차피 이곳을 관리하던 이는 텔로미어다. 소녀가 텔로미어의 기억을 받은 이상, 늦건 이르건 간에 언젠간 알게 될 일이었다. 일단 그녀는 물건을 살폈다. 절개된 봉인이 아직 아물어 있지 않았다. 봉인이 굳건하게 되어있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봉인이 아물지 않아서 가지려면 쉽게 가져갈 수 있다는 점이 소녀의 관심을 자극했다.
그 짧은 검은 슬레이어. 인간에게 존재하는 그 어떤 역사나 신화를 둘러봐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유물이었다. 어느 고서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구전으로도 전해지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멋도 흥도 없는 이름의 나이프였다.
하지만, 그 능력은 강력했다. 물론 그 짧은 검이 가져다주는 죽음은 실질적인 죽음이 아닌,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죽음을 거부할 정신력이 없다면 그대로 그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효과는 진짜 죽음과 같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짧은 검을 쥐고는 중얼거렸다.
“소드 윗치라고 했었나….”
뽑아보지는 않았지만 일단 챙겨두었다. 분명 그것은 그 자체도 강력한 힘을 지닌 물건이었지만, 소녀가 그 짧은 검을 취한 이유는 소드 윗치 녹티스라는 존재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소녀는 왠지 모르게 검을 잡고 싶었다. 소녀는 그런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럼에도 슬레이어를 챙겼다. 자기가 자신이 아닌 듯한 불쾌감이 소녀의 전신을 잠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느끼는 욕망을 거부하는 것도 우스울 노릇이지.”
소녀는 거부감을 느꼈지만, 결국에는 이번에도 아까 교복을 얻었을 때처럼 순순히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였다. 짧은 검을 검집째로 스커트의 허리춤에 꽂아넣었다. 문밖에서 소녀의 혼잣말을 들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엉~? 뭐라고 했어?
소녀는 사내를 무시했다. 이제 이 이상의 볼일은 없었다. 이제 만드라고라를 입수해서 탈출하면 모든 일이 끝났다.
하지만, 이 작은 박물관의 광경이 그녀로서는 참으로 간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녀에겐 이 이상 필요한 물건은 없었지만, 그 외에도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호품이 연기처럼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이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소녀는 그 당시 자신이 뭘 어떻게 했었는지 전부 다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기억은 행위뿐이었다. 자신이 그 당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이상하리만큼 희미했다. 소녀는 쓰게 웃으며 미련 없이 그 추억에서 눈을 돌렸다.
그때, 드디어 한참을 헤매던 만드라고라가 불쑥 하고 땅 밖으로 이마를 내밀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만드라고라임이 거의 틀림없는 그 식물의 윗머리는 놀랍게도 거의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이윽고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만드라고라의 머리에 있던 풀줄기가 가닥가닥으로 분해되어서 가라앉았다. 그것은 마치 녹색의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만드라고라가 소녀를 보고서 처음 한 말은 이것이었다.
“웃차차… 아, 힘들다.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요…. 끼었어요.”
“수확을 원하는 건가?”
여전히 쿨한 표정으로 슬레이어를 뽑아들고 접근하는 소녀의 기세에, 땅 위로 머리만 내민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리고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긴 녹색의 머리카락을 마치 팔처럼 사용하며 몸을 밀어내고 땅을 파내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왔다. 땅속에서 완전히 나온 만드라고라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전신이 흙투성이에 벌거벗은 몸이긴 했지만, 머리의 풀줄기가 변화한 녹색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나서 전신의 흙을 탁탁 털어냈다. 그 광경을 본 소녀가 중얼거렸다.
“편리하군.”
만드라고라는 먼 과거, 인간이 인간을 처형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그 처형된 인간의 피 아래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식물이었다. 탄생으로 따지면 인간이라는 종의 자식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런 이 식물을 언제부터 윗치 스쿨에서 한 뿌리 보관하기 시작했는지는 소녀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여기 이 만드라고라야말로 아마도 인간에게서 재배된 것 중에서는 최대 최고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녀도 이 만드라고라가 이 정도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뭐 물론 소녀의 입장에서는 만드라고라의 모습이 남자인 것보다는 여자 아이인 편이 부담이 적었지만.
만드라고라는 자신의 몸에 붙은 흙을 전부 털어낸 후, 소녀의 모습을 살폈다. 마치 물건의 품평이라도 하려는 듯이 집요하게 살피는 만드라고라의 녹색 눈동자가 소녀에겐 매우 부담이 되었다. 모래알을 씹는 듯한 시간이 흐른 후, 만드라고라의 소녀에 대한 품평이 떨어졌다.
“칫, 소름끼치는 개그를 한 주제에 생긴 건 귀엽네요. 분하다.”
소녀는 잠시 침묵한 후, 이마를 꾹 누르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랄하군….”
“으음, 혼자 수천년동안 땅속에 심어져 있다 보면 누구라도 이렇게 낙천적이 될 수 있어요. 그쪽도 한번 해보겠어요?”
“싫다.”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2-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3-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4-
윗치 스쿨 본관의 지하실. 이곳에는 그동안 마녀들이 모아둔 지식과 수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은 그중에서도 텔로미어가 직접 관리하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지팡이를 강하게 쥐었다. 이 지팡이는 마녀라는 종의 수명을 상징하는 텔로미어의 증표이자, 먼 과거에는 자신의 것이었던 물건이었다. 비밀 창고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녀는 예전에 그 비밀창고를 직접 관리했던 적도 있었다. 장소를 모를 리가 없었다. 거침없이 전진하는 소녀의 뒤를 사내가 성큼성큼 따랐다. 잠시 후 멈춰 선 소녀가 앞의 벽을 막고 있는 석판을 지팡이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석판을 치워.”
“직접 해도 될 것을, 꼭 부려 먹는구만.”
“치워.”
“알았다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헐렁한 교복과, 몸에 비해서 지나치게 길고 커다란 자매의 유산을 지닌 소녀의 모습은 초반에 비해서 조금 더 애교가 있었지만, 역시 그 내용물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냉정한 소녀의 시선에 사내는 투덜거리며 거대한 석판을 치웠다. 그 거대한 석판은 있던 자리에서 치워지자마자 어딘가로 사라졌다. 석판 너머에는 아무런 조명도 없는 긴 통로가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망설임도 없이 통로로 들어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그들은 윗치스쿨 내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봉인 비고에 도착했다.
그 입구는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거대했다. 그야말로 문으로 사용되기엔 어리석은 스케일을 자랑했다. 웅장하다는 말보다는, 바보스럽다는 말이 차라리 어울렸다. 분명 석판 뒤의 통로는 그다지 넓지 않았건만, 어느 사이에 이렇게 넓어져서 이리 거대한 문이 존재하는 곳까지 오게 된 걸까.
하지만, 소녀는 한 줌의 동요도 없이 녹보석의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서서히 지팡이의 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지팡이에서 뿜어지는 빛과 함께, 서서히 문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어둠으로 가득 찬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조그마한 소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 의해 밝아지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함이 있었다. 녹색 빛에 의해 사방에서 생겨난 그림자가 흔들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성화에 던져진 마귀와 같았다. 공명이 점차 빨라지고,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야수처럼 우렁차게 울부짖기 시작한 거대한 철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자신의 거체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 웅장한 모습에 감탄했다.
“아, 그 지팡이. 그래서 가져 온 거로군. 이거 대단한데.”
소녀는 그런 사내를 무시하고서 문이 거의 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안으로 슬쩍 들어섰다. 사내는 투덜거리며 아직 통과하기엔 좁은 틈으로 자신의 커다란 몸을 밀어넣으려 했지만, 문은 소녀가 들어가버리자 더는 열리지 않았다. 사내는 입술을 내밀며 문틈의 옆에 무릎을 안고서 쪼그려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문밖의 사내야 우울하건 외롭건 간에, 소녀는 작은 박물관처럼 꾸며진 조그만 방으로 들어섰다. 이곳이야말로 텔로미어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텔로미어조차 내부의 물품을 사사로이 할 수 없는 윗치 스쿨의 금역중의 금역이었다. 분명 작은 곳이지만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다른 물건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만드라고라… 여기인가.”
그곳에는 석판이 깔린 돌 바닥들 중 일부가 벗겨져서 화단을 이루고 있었다. 바닥이 제거된 부분은 축축한 검은 흙이 깔려 있었고, 거기에는 녹색의 잎사귀가 살짝 자신의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풀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땅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섭다면 충분히 무서운 상황이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한가로워서 듣는 사람의 맥을 뽑았다.
-아야야야… 아파요.
하지만 소녀는 땅속의 호소를 무시하고, 에누리없이 예의 그 무표정으로 풀줄기를 붙잡고 꽉 꽉 잡아당겼다. 잠깐의 소란(고통스러운 비명)이 있은 후, 땅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뽑아주나 두근두근 거리면서 ‘얼른 뽑아 줘~ 뽑으면 신나게 비명을 지를 테야~’ 하고 기다린 지 수백 년이 지났어요. 그런데 이제야 새삼스럽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이유가 뭐죠?
“내 마음이다.”
-뭐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생긴 녀석이기에 이렇게나 무례한 소리를 해 대는지 얼굴이나 좀 봐요!
“좋을 대로 해라. 알아서 나와준다니 나야 사양할 것 없구나.”
-으읔,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땅속에 있어서 몸이….
“얼른 나오지 않으면 어린아이가 무력한 식물에게 얼마나 잔혹해 질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
그 소리를 듣자, 구시렁거리던 땅속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밖에서 한창 조용하던 사내의 폭소가 들려왔지만, 소녀는 무시하고 얼굴을 다른 쪽으로 향했다.
소녀는 눈을 감고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말하자면 보물의 산이었다. 소녀의 눈이 저 한구석에 안치된 네크로노미콘이라는 검은 표지의 책에 잠시 머물렀지만, 이내 흥미를 잃었다.
“네크로노미콘… 영장의 감옥인가. 지금의 나에겐 필요 없겠지.”
소녀는 다시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눈알 하나가 떠 있는 조그마한 수조를 봤다. 그 눈알은 물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액체에 둥둥 떠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마주 노려봐주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시선을 돌린 눈알을 따라가서 다시 눈을 마주쳤지만, 그 눈알은 계속해서 소녀를 외면했다. 한참을 빙글빙글 돌며 시간을 보내던 소녀는 결국 질린 듯했다. 수조 안에 담긴 주제에 그 눈알은 울먹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 소녀의 눈길이 머문 곳에는 조금 특별한 물건이 있었다. 그곳에는 한 자루의 짧은 검이 있었다. 마술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 쇠사슬로 둘둘 묶여있었지만, 소녀는 그 쇠사슬 곳곳에 퍼져있는 균열을 볼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봉인이 한번 풀렸던 건가. 어디에 쓰인 거지?”
뭐, 어차피 이곳을 관리하던 이는 텔로미어다. 소녀가 텔로미어의 기억을 받은 이상, 늦건 이르건 간에 언젠간 알게 될 일이었다. 일단 그녀는 물건을 살폈다. 절개된 봉인이 아직 아물어 있지 않았다. 봉인이 굳건하게 되어있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봉인이 아물지 않아서 가지려면 쉽게 가져갈 수 있다는 점이 소녀의 관심을 자극했다.
그 짧은 검은 슬레이어. 인간에게 존재하는 그 어떤 역사나 신화를 둘러봐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유물이었다. 어느 고서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구전으로도 전해지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멋도 흥도 없는 이름의 나이프였다.
하지만, 그 능력은 강력했다. 물론 그 짧은 검이 가져다주는 죽음은 실질적인 죽음이 아닌,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죽음을 거부할 정신력이 없다면 그대로 그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효과는 진짜 죽음과 같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짧은 검을 쥐고는 중얼거렸다.
“소드 윗치라고 했었나….”
뽑아보지는 않았지만 일단 챙겨두었다. 분명 그것은 그 자체도 강력한 힘을 지닌 물건이었지만, 소녀가 그 짧은 검을 취한 이유는 소드 윗치 녹티스라는 존재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소녀는 왠지 모르게 검을 잡고 싶었다. 소녀는 그런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럼에도 슬레이어를 챙겼다. 자기가 자신이 아닌 듯한 불쾌감이 소녀의 전신을 잠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느끼는 욕망을 거부하는 것도 우스울 노릇이지.”
소녀는 거부감을 느꼈지만, 결국에는 이번에도 아까 교복을 얻었을 때처럼 순순히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였다. 짧은 검을 검집째로 스커트의 허리춤에 꽂아넣었다. 문밖에서 소녀의 혼잣말을 들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엉~? 뭐라고 했어?
소녀는 사내를 무시했다. 이제 이 이상의 볼일은 없었다. 이제 만드라고라를 입수해서 탈출하면 모든 일이 끝났다.
하지만, 이 작은 박물관의 광경이 그녀로서는 참으로 간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녀에겐 이 이상 필요한 물건은 없었지만, 그 외에도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호품이 연기처럼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이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소녀는 그 당시 자신이 뭘 어떻게 했었는지 전부 다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기억은 행위뿐이었다. 자신이 그 당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이상하리만큼 희미했다. 소녀는 쓰게 웃으며 미련 없이 그 추억에서 눈을 돌렸다.
그때, 드디어 한참을 헤매던 만드라고라가 불쑥 하고 땅 밖으로 이마를 내밀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만드라고라임이 거의 틀림없는 그 식물의 윗머리는 놀랍게도 거의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이윽고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만드라고라의 머리에 있던 풀줄기가 가닥가닥으로 분해되어서 가라앉았다. 그것은 마치 녹색의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만드라고라가 소녀를 보고서 처음 한 말은 이것이었다.
“웃차차… 아, 힘들다.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요…. 끼었어요.”
“수확을 원하는 건가?”
여전히 쿨한 표정으로 슬레이어를 뽑아들고 접근하는 소녀의 기세에, 땅 위로 머리만 내민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리고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긴 녹색의 머리카락을 마치 팔처럼 사용하며 몸을 밀어내고 땅을 파내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왔다. 땅속에서 완전히 나온 만드라고라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전신이 흙투성이에 벌거벗은 몸이긴 했지만, 머리의 풀줄기가 변화한 녹색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나서 전신의 흙을 탁탁 털어냈다. 그 광경을 본 소녀가 중얼거렸다.
“편리하군.”
만드라고라는 먼 과거, 인간이 인간을 처형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그 처형된 인간의 피 아래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식물이었다. 탄생으로 따지면 인간이라는 종의 자식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런 이 식물을 언제부터 윗치 스쿨에서 한 뿌리 보관하기 시작했는지는 소녀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여기 이 만드라고라야말로 아마도 인간에게서 재배된 것 중에서는 최대 최고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녀도 이 만드라고라가 이 정도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뭐 물론 소녀의 입장에서는 만드라고라의 모습이 남자인 것보다는 여자 아이인 편이 부담이 적었지만.
만드라고라는 자신의 몸에 붙은 흙을 전부 털어낸 후, 소녀의 모습을 살폈다. 마치 물건의 품평이라도 하려는 듯이 집요하게 살피는 만드라고라의 녹색 눈동자가 소녀에겐 매우 부담이 되었다. 모래알을 씹는 듯한 시간이 흐른 후, 만드라고라의 소녀에 대한 품평이 떨어졌다.
“칫, 소름끼치는 개그를 한 주제에 생긴 건 귀엽네요. 분하다.”
소녀는 잠시 침묵한 후, 이마를 꾹 누르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랄하군….”
“으음, 혼자 수천년동안 땅속에 심어져 있다 보면 누구라도 이렇게 낙천적이 될 수 있어요. 그쪽도 한번 해보겠어요?”
“싫다.”
# by | 2005/12/24 13:04 | 글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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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네 잠에서 깨어난, 에서는 마침내.. 죠오. 오타 하나 찾았습니다. 칭찬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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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빠// 세포의 수명을(후략)
금속유령에 비해서는 이야기가 소재나 배경 탓인지 좀 정형화되어 가는 느낌도 있군요. 이영도 식 문장 꼬기 유머는 5편까지의 얘기 전반에 걸쳐 눈에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줄었고, 또 중간중간 세심하고 좋은 서술들이 눈에 띕니다만, 간간히 조금씩 올이 일어난 듯 눈에 거슬리는 대사나 서술들 또한 눈에 밟히는 것 같습니다.
금속 유령이 인간대 인간 관계(특히 나와 여동생)에 있어 개성이 조금 희미했던데 반해, 이 작품은 지금까지 분량 하에서는 캐릭터간 관계에서 대비되는 성격들이 눈에 잘 띄는 듯 합니다.
다만, 아직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분량이지만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 전형적인 전개, 전형적인 대결 구도로 흘러갈 수 있는 여지도 조금은 보이는 듯 합니다. 물론, 전형성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며, 그런 전형성 소에서도 글을 잘 다듬으면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글루에 적합하지 않은 댓글이 아니었나 조금 걱정이 되긴 하는군요.
p.s 그런데 짧막하게 등장했던 네크로노미콘은 일종의 오마쥬인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