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1일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8-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1-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2-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3-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4-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5-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6-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7-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한 황혼빛의 난무가 전장에서 피어났다. 보는 이들의 눈을 어지럽게 하는 아름다운 빛의 움직임이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의 궤적을 훑었다. 날아드는 총탄을 황혼빛 검날이 후려갈긴다. 강대한 마력의 검날에 정면으로 얻어맞은 그 총탄은, 반으로 쪼개지며 날아들던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날아간다. 소녀의 움직임은 질풍 같았고, 소녀가 휘두르는 검세는 광풍 같았다.
소녀가 검을 한번 휘두르는 것은 최소한 두세 가지 이유가 동시에 깃들여 있었다. 총탄을 막고 적을 참하고 적을 현혹시켰다. 소녀를 쫓는 시선은 어쩔 수 없이 황혼빛 검날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 그 찰나의 흐려진 정신을 소녀는 너무나 잘 알고, 교묘하게 이용했다. 적 병사들 중에서는 간혹 총이 아닌 마술로 소녀를 공격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소녀는 그런 틈을 용인하지 않았으며, 어쩌다가 마술이 구현 되더라도 더더욱 강대하고도 파괴적인 마술이 깃든 그녀의 광검으로 베어버렸다. 마술은 세계를 속이는 힘. 속임수는 더더욱 강대한 속임수에 의해 분쇄된다. 소녀의 검은색 흑발이 춤을 추듯이 튀고, 그를 따라 황혼빛 검날이 피보라를 만들었다. 소녀가 입은 푸른 교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광경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살육자의 역할을 맡은 이는 교복차림이 잘 어울리는 어린 소녀였다. 보통은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음을 알더라도 친하던 애완동물의 무덤 수준에 머물러야 할 작은 소녀. 하지만, 지금 그 소녀는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생명을 베어버리고 있었다. 그 광경은 여러 의미로 지옥과도 같았다.
하지만, 소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사신이라 불리던 몸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여섯 살 때 일이었다. 그날 이후로 벌써 거진 8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에도 무수한 생명을 죽여왔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슬퍼할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토록 살의가 고스란히 구현된 것 같은 소녀의 활약은, 원류 추종자들의 광신도들조차 한순간 그들의 신앙을 잊게 만드는 흉포함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기 위해 서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신은 멀고, 결코,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사신은 무척이나 가까웠다.
소녀는 그런 적들을 확인했다. 총탄을 피하며 나무를 박차고 올라, 그대로 줄기의 옆면을 타고 걸어서 다른 나무로 뛰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 나무를 박차며 방금 타고 올랐던 나무를 향해 다시 뛰었다. 그리고 그 나무를 향해서,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킥을 날렸다. 길게 묶은 흑발머리의 다발과, 길게 뻗어진 다리에 신고 있는 검은 오버니삭스 덕분에 순간적으로 그녀의 모습은 옆으로 돌아가는 검은 팽이처럼 보였다. 소녀의 발차기가 나무에 작열했다. 그러자 소녀의 발차기를 맞은 나무의 줄기가 마치 폭탄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터져버렸다. 소녀가 신고 있는 특별한 부츠의 능력이었다. 일명 임팩트 부츠. 일정 수준의 타격을 자유롭게 흡수, 방출할 수 있는 마술 신발이었다.
어쨌든, 그리하여 거대한 거목의 시신이 병사들의 무리를 덮쳤다. 적들은 그 나무에 깔리거나, 깔리진 않더라도 순간적으로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어야만 했다. 적들이 무력화된 그 틈을 노린 소녀가 바로 외쳤다.
“풀 드라이브!”
그 순간, 소녀가 쥐고 있던 광검의 아랫부분이 담뱃갑 밀려나오듯이 튀어나왔다. 한순간에 50cm 정도로 광검의 본체가 길어졌다. 소녀는 그것을 양손으로 쥐고는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차 광검에서 뿜어지는 빛줄기의 강도가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아까의 것이 빛의 검날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빛의 기둥이었다. 1m가량 되던 검날이 지금은 15m를 넘어섰다. 소녀는 그 광검을 양손 검처럼 쥐고서 허리를 크게 비틀었다.
“이런 상황엔 뭐라고 기술명이라도 외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다 선생님 탓이야.”
소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거대한 빛의 참격을 옆으로 휘둘렀다. 비틀린 허리에 집약되었던 힘이 한 번에 펼쳐졌다. 소녀의 검은 그렇게 주변의 전방위를 일순간에 베어버렸다. 그 모습은 가히 자연현상에도 비견할 수 있는 장엄한 모습이었다. 그 일격으로 그녀의 주변에 있던 모든 나무가 두부처럼 썰려서 소녀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갔다. 특히 소녀가 검격을 가속시킨 적병들이 있던 부분은, 검날의 길이가 추가로 두 배 정도로 길어졌었다. 빛의 검날은 빛의 기둥이 되었고, 빛의 기둥은 크게 휘둘러져 빛의 원이 되었다. 폭발과도 같은 그 일격에 모든 것이 베어졌다.
황혼의 빛이 흐리게 만든 눈을 비비고 바라본 그곳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소녀를 중심으로 오랜 나무들과 유적지의 돌로 된 조각 등등은 전부 다 일정한 높이에서 절단되어 있었다. 그 참격에 휘말린 적병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유지되던 경관을 일격으로 파괴한 소녀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방금의 그 일격으로 주변의 모든 인간의 기척이 사라지거나 무력화되었다. 소녀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살짝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에는 성취감도, 기쁨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끝을 모를 정신적 피로만이 있을 뿐이었다.
소녀의 손에 들린 광검의 검날은 어느 사이에 다시 원래의 1m 정도의 길이로 돌아와 있었다. 풀 드라이브 때문에 추가로 튀어나와 있던 부분도 다시 들어가 있었다. 소녀는 그 광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허공에 집어던진 후, 그것을 보지도 않고 다시 낚아챘다.
다시 소녀의 손에 잡힌 그것은 어느새 반으로 접혀서 넓적하고 네모난 패처럼 되어 있었다. 소녀는 그 패를 슬쩍 놓았다. 어느새 그 패는 소녀의 벨트와 은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슬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적당한 길이로 조절되었다.
소녀는 주변을 한번 돌아본 후, 귓가의 무전기에 손을 올렸다.
“…정리 끝. 부상병에게 들었겠지만 저격수의 제보가 있으니 주의할 것. 나는 그 저격수를 찾으러 갈 테니까 몸을 사려.”
하지만 무전기 저편에서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소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장?”
무전기 저편은 말 그대로 조용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의 숨소리는 들리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무전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때였다.
-까꿍!
갑작스러운 괴성이 무전기에서 들려왔다. 소녀는 깜짝 놀라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창가에서 졸고 있는데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떠민 느낌이랄까.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장난질에 소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떨렸다. 하지만, 소녀는 무전기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온 목소리의 정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소녀는 그 목소리가 원래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노는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분명 낯익은 목소리지만 원주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히히히히히! 혹시 놀랐나요? 아니 저도 이 무전기로 누가 말을 걸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장난을 친 것뿐이에요. 너무 화내지 말아주세요.
“장난치지 마! 넌 누구야?”
-우와, 그런데 이게 누구야. 이 듣는 것만으로도 발정해버릴 것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의 주인은 소드 윗치로군요! 너무너무 반갑습니다. 여전히 건강한 것 같아서 여기 이 우쿠 의사 선생님은 너무너무 기쁩니다.
소녀는 등 뒤로 오한이 달렸다. 무전기 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익숙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지 피에로의 느낌이 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 소녀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네크로멘서 닥터, 우쿠.
마도의 사생아. 미쳐버린 마술사이자 살인 의사. 무시무시한 능력을 갖춘 살인마이고, 일단 공식적인 직업은 살인 청부업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살인 의뢰를 하는 이는 무척이나 적었다. 청부비가 비싸서는 아니었다. 그저 우쿠와 연관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불행을 겪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우쿠의 손에 의해서.
네크로 닥터 우쿠와 소녀의 인연은 짧은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이미 그를 네 번 베어버린 경험이 있었다. 그럼에도, 자기가 언제 죽었냐는 듯이 불사신처럼 계속 되살아나는 이 자야말로 소녀가 가진 모든 악연들 중에서도 최악의 존재였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붉은 눈을 꽉 감아 버렸다.
“네가 거기엔 왜 있지? 너한테는 할 말 없으니까 전화 주인 바꿔.”
무전기 저편의 남자는 소녀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자신이 할 말만을 계속 해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인플루엔자 같은 것은 보통 몸조리만 잘하면 나아버리지만, 그래도 병원에 가면 빨리 낫잖아요? 그렇죠?
소녀는 정말 우쿠 의사 만큼은 절대로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나름대로 질긴 악연이다 보니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미친 사람이다. 소녀는 이를 악물면서도 그에게 조금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소녀는 억지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무리하게 친근한 느낌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물론 표정은 잔뜩 일그러진 상태였지만 말이다.
“휴우. …응. 그렇지. 근데 그게 왜?”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행운아들이에요! 우연히 마주친 착한 의사 선생님을 만났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빠르게 자신들의 병을 치유 받을 수 있었지요! 인술을 펼치는 정의의 무면허 의사!
소녀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탄식했다.
“아아, 알겠어. 다 죽였구나.”
-삶이란 질병 같은 거에요. 이 세상에서 살아 숨을 쉬는 모든 존재는 세계에 기생한 기생충이고, 그 기생충인 장본인들도 살아있다는 이유로 크게 고통받고 있어요! 아하, 괴로운 일이지요.
소녀는 이마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에 짓눌린 이마가, 마치 하얀 종이 위에 핏방울이 떨어지듯이 붉게 물들었다.
-제가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아가씨의 주치의인데도 아가씨의 병은 고쳐줄 수가 없다는 거에요.
“네 놈이 언제부터 내 주치의냐.”
-우리가 서로 만났다간, 또다시 그 빌어먹을 황혼의 마검 트와일라잇으로 이 불쌍하고 충실한 의사 선생님을 서걱서걱 썰어버리겠죠? 트와일라잇이라, 네 번이나 살해당하고 나니 외워지더군요! 제게 있어선 그 검광은 그야말로 황혼과 같으니, 정말로 절묘하다면 절묘한 이름이에요.
“잘 알고 있군.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이번엔 아주 갈기갈기 썰어줄 테니까. 다시 살아날 수 없어질 때까지 완전히 잘게 썰어주지.”
무전기 저편의 남자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유감입니다. 전 이미 유적 안이에요. 이 유적은 입구가 하나가 아니거든요. 몰랐죠?
소녀가 아이언 스태프에서 이곳으로 파견될 때, 그런 이야기는 조금도 듣지 못 했었다. 의도적으로 정보가 누락된 느낌이 들었다. 애초부터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이상했다. 이건 뭔가 아니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정말 싫은 기억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사신이라 불리게 된 일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소녀는 아이언 스태프의 정식 용병이자 특급 에이전트이지만, 그 전의 소녀는 윗치 스쿨이라는 학교의 학생이었다. 윗치 스쿨의 교훈은 ‘책상 위에서 마술은 완성되지 않는다.’였다. 그렇기 때문에 윗치 스쿨은 새내기 마녀들에게 현장의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서 종종 아이언 스태프에 보조 인원을 파견하곤 했다. 그 보조 인원은 대부분 졸업을 앞둔 마녀들이었지만, 어이없게도 언제부턴가 졸업을 하려면 앞으로도 까마득할 어린 나이의 그녀가 빠진 적이 없었다.
윗치 스쿨의 많은 사람이 소녀가 죽어버리길 원했다. 더군다나 아이언 스태프의 내부에도 그녀가 죽길 바라는 마녀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 덕분에 소녀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정식 에이전트도 아닌데도, 보통의 수습 파견은 투입 될 리가 없을 지옥으로 투입되었다. 더군다나 그 미션은 그야말로 함정 투성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그 과정에서 얻은 별명이 바로 사신이었다. 동료 용병들 입장에서 그녀가 끼어든 미션은 지옥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 지옥에서 그녀는 반드시 살아 남았으니 그렇게 불릴 만도 했다. 소녀에게 있어서 그 당시는, 정말 싫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소녀가 윗치 스쿨을 나오고서 아이언 스태프에 정식으로 입대한 후, 서서히 그녀를 사신이라 부르는 이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소녀가 소드 윗치라는 칭호를 얻은 이후로 동료 용병들에게 사신이라 불리운 적은 없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이래서야 사신재림이잖아…. 빌어먹을.”
소녀는 가까운 나무 밑동을 걷어찼다. 군데군데 아이언 플레이트로 강화된 육중한 부츠가 밑동의 한구석을 부숴버렸다. 소녀의 발은 임팩트 부츠의 충격 흡수 효과로 인해서 별반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그 대신 막 잘려나간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이 조금이지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소녀는 자신의 부츠에 끈끈하게 붙어오는 수액의 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화풀이가 전혀 안 되네.”
-화풀이가 필요하시다면 거기 있는 입구로 들어오세요! 전 유적 안에 있고, 입구에는 화풀이 대상도 기다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 임무도 완수하셔야 할 테니 일석삼조겠지요?
소녀는 애꿎은 나무 밑동을 향해서 계속해서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한 번의 발길질로 발길질의 충격을 흡수하고, 다음번의 발길질에 그 충격을 방출시켰다. 다시 다음 발길질로 흡수하고, 다음 발길질에 방출. 흡수, 방출, 흡수, 방출. 소녀가 계속해서 걷어차는 사이에, 그 나무 밑동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누가 지미닉의 허벅지를 갈겼나 했더니, 네놈의 인형이었군.”
-오, 노. 애니 간호사는 여기에 있어요? 애니 간호사, 소드 윗치에게 인사하세요.
무전기 너머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사리지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천사와 같았으나, 그 목소리가 이루는 억양은 어딘지 기계적인 느낌이 강했다.
-안녕하세요. 애니 간호사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아가씨. 저는 우쿠 의사 선생님 덕분에 무척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장난칠 생각 없으니 꺼져라 섹스 돌. 당장 그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우쿠 의사 선생님을 바꿔.”
소녀는 무전기 저편의 여성의 안부 인사를, 무언가를 씹는 듯한 어투로 험악하게 응대했다. 소녀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그 말을 들은 무전기 저편의 여성은 여전히 기계적인 어조로 말했다.
-네. 그럼 다시 선생님을 바꿔드리겠습니다. 다시 뵙게 될 그날까지 건강하시길 빌어요.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남성의 목소리가 나타났다. 그 목소리에는 과장된 흐느낌이 담겨있었다.
-저런, 나이도 어린 아가씨가 입에 담기엔 너무 심한 말이군요. 우쿠 의사 선생님은 너무 슬퍼요. 그런 경멸, 제가 받았으면 얼마나 기뻤을까요. 흑흑. 그러니까 제게도 뭔가 말해주지 않겠어요?
“이 자식….”
이를 가는 소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전기 저편의 남자는 다시 쾌활해져서 말했다.
-방금 지미닉 스켄브로이가 총에 맞았다고 하셨나요? 저런, 안되었군요. 하지만, 내가 한 것은 그저 신전 입구에 있을 저격수에게 조금 특별한 총탄을 제공한 것뿐입니다. 제가 최근 관심을 두던 분야가 무엇인지 혹시 알고 계신가요?
소녀는 완전히 박살난 나무 밑동을 뒤로하고 다음 밑동으로 향하며 말했다. 다음 밑동의 앞에 도착한 소녀는 그것을 향해서 아까와 같은 발길질을 시작했다.
“내가 알게 뭐야.”
-운명을 바꾸는 능력이에요! 그리고 그 탄환은 이 과정에서 나온 실험품이지요. 탄환에 부여된 의미는 ‘일격필살.’입니다.
“….”
일격필살이라는 말에, 소녀는 발길질을 멈추고 조용히 남자의 말을 경청했다.
-그게, 저는 탄환에 일격필살을 담으면 바로 급소로 날아가 맞을 줄 알았는데, 역시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해서 대충 쏴도 총알이 미사일처럼 퓽퓽 날아가는 건 안 되더군요. 하지만, 그 총탄에 맞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네, 죽지요. 언젠간 죽어요. 내가 그 총알에 원하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보통 사람도 언젠가는 죽을걸.”
-맞아요. 그래서 결과가 너무 시시한 탓에 바로 때려치웠습니다. 역시 제 연구 대상은 인간의 몸이 더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가끔은 기분 전환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럭저럭 재미있는 자극이 되었지요. 어쨌든 그 덕분에 외도는 끝냈습니다만, 조금은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아가씨가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누구나 언젠간 죽고, 그 총탄을 맞아도 누구나 언젠간 죽습니다. 다만, 그게 좀 더 빨리 죽게 되지요. 죽는 원인은 독도 상처도 아닙니다. 맞는 순간 대상에게 부여되는 운명입니다. 운명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어. 독은 해독하면 되고 상처는 치료하면 되지만, 운명은 피할 수 없어요!
우쿠는 언뜻 보면 미치광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도 미치광이였다. 다만, 미친 천재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하는 일은 너무나 방대했다. 때로는 살인 청부업자, 때로는 의사, 때로는 마술사, 때로는 광대, 때로는 과학자, 때로는 연금술사. 마도의 집약은 그들의 발전을 꾀어냈지만, 그 결과 우쿠 같은 미친 천재에게 방대한 능력을 부여하기도 했다.
먼 과거, 마도는 분열되어 있었다. 주술사와 의사, 마술사, 연금술사와 그 외에도 각지에 흩어진 토속 종교의 무당들과 지금은 짐작도 할 수 없는 태고의 비술을 간직하던 이들. 그들은 제각기 나름의 기술과 나름의 지식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들은 무척이나 폐쇄적으로 살아갔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의 특징상, 그 폐쇄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공개적으로 연구할 성질의 것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마치 운명처럼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이 어느 한 마술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되어졌다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 있던 섬이었다. 그 당시의 어떤 인간도 그곳에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태평양의 한가운데. 그 당시 인간의 항해술이라는 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마술사는 그곳에 갈 수 있었다.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에는 지구 각지로 통하는 워프 게이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 워프 게이트는 일방통행도 있었지만, 쌍방통행의 것도 있었다.
그 마술사는 일방통행의 게이트를 우연하게 발견해서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으로 오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각지를 게이트로 돌아다니며 세계를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그 마술사는 수없이 많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마도에 접근하던 이들과 조우했다. 문명의 여명이 아직은 희미하던 머나먼 옛날의 이야기였다.
그것을 계기로, 마도의 수상한 지식을 연구하고 사용하던 무리가 세계 각지에서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여행을 할 때 그들은 벌써 그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한순간에 도약한 것이다.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이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모여들어서, 조금씩 서로가 가지고 있던 신비학을 교류하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세계 각지에 모래알처럼 흩어졌을 마도가 천천히 모여들게 된 것이다. 물론 폐쇄적인 그들이 지금처럼 마도협회를 구성하고, 탄탄하게 체계를 이루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 계기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겠다.
어쨌든, 저 우쿠야말로 그렇게 몰려들어 완성된 대부분의 마학에 모두 통달한 천재였다. 모든 마술과 지식의 전승이 세계 각지에 모래알처럼 퍼져서 폐쇄적으로 연구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마도의 부흥은 없었겠지만, 저런 악마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소녀는 믿기지 않는 우쿠의 연구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우쿠는 분명 미친 악당이긴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운명을 조종할 방법을 손에 넣고서, 그것이 자기가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던져버린 이 천재의 능력은 그야말로 경탄할만한 것이었다. 소녀는 나지막이 그것을 인정했다.
“우쿠, 넌 정말 천재야.”
-오호? 아가씨의 매도와 욕설도 상쾌하지만 칭찬을 들어버릴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물론 아가씨도 예뻐요, 착해요, 귀여워요, 똑똑해요! 가까이 있다면 언제나 사탕이라도 쥐여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하십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소녀는 무전기 저편의 남자가 퍼붓는 무수한 찬사에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 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같이 미친 놈에게 그 천재적인 머리는 위험해.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떼어내서 으깨줄테니까 거기서 목 씻고 기다려. 핵폐기물보다도 위험한 폐기물의 탄생이겠군.”
무전기 너머에서 남자가 장난스럽게 애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소녀는 자신의 귓가에서 무전기를 뽑아서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그 무전기를 세게 짓밟으며 임팩트 부츠에 충전된 모든 타격을 기폭 시켰다. 마치 우쿠 의사의 머리를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라도 하듯이.
[영원의 밤]1권- 검의 마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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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검을 한번 휘두르는 것은 최소한 두세 가지 이유가 동시에 깃들여 있었다. 총탄을 막고 적을 참하고 적을 현혹시켰다. 소녀를 쫓는 시선은 어쩔 수 없이 황혼빛 검날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 그 찰나의 흐려진 정신을 소녀는 너무나 잘 알고, 교묘하게 이용했다. 적 병사들 중에서는 간혹 총이 아닌 마술로 소녀를 공격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소녀는 그런 틈을 용인하지 않았으며, 어쩌다가 마술이 구현 되더라도 더더욱 강대하고도 파괴적인 마술이 깃든 그녀의 광검으로 베어버렸다. 마술은 세계를 속이는 힘. 속임수는 더더욱 강대한 속임수에 의해 분쇄된다. 소녀의 검은색 흑발이 춤을 추듯이 튀고, 그를 따라 황혼빛 검날이 피보라를 만들었다. 소녀가 입은 푸른 교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광경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살육자의 역할을 맡은 이는 교복차림이 잘 어울리는 어린 소녀였다. 보통은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음을 알더라도 친하던 애완동물의 무덤 수준에 머물러야 할 작은 소녀. 하지만, 지금 그 소녀는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생명을 베어버리고 있었다. 그 광경은 여러 의미로 지옥과도 같았다.
하지만, 소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사신이라 불리던 몸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여섯 살 때 일이었다. 그날 이후로 벌써 거진 8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에도 무수한 생명을 죽여왔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슬퍼할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토록 살의가 고스란히 구현된 것 같은 소녀의 활약은, 원류 추종자들의 광신도들조차 한순간 그들의 신앙을 잊게 만드는 흉포함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기 위해 서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신은 멀고, 결코,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사신은 무척이나 가까웠다.
소녀는 그런 적들을 확인했다. 총탄을 피하며 나무를 박차고 올라, 그대로 줄기의 옆면을 타고 걸어서 다른 나무로 뛰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 나무를 박차며 방금 타고 올랐던 나무를 향해 다시 뛰었다. 그리고 그 나무를 향해서,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킥을 날렸다. 길게 묶은 흑발머리의 다발과, 길게 뻗어진 다리에 신고 있는 검은 오버니삭스 덕분에 순간적으로 그녀의 모습은 옆으로 돌아가는 검은 팽이처럼 보였다. 소녀의 발차기가 나무에 작열했다. 그러자 소녀의 발차기를 맞은 나무의 줄기가 마치 폭탄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터져버렸다. 소녀가 신고 있는 특별한 부츠의 능력이었다. 일명 임팩트 부츠. 일정 수준의 타격을 자유롭게 흡수, 방출할 수 있는 마술 신발이었다.
어쨌든, 그리하여 거대한 거목의 시신이 병사들의 무리를 덮쳤다. 적들은 그 나무에 깔리거나, 깔리진 않더라도 순간적으로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어야만 했다. 적들이 무력화된 그 틈을 노린 소녀가 바로 외쳤다.
“풀 드라이브!”
그 순간, 소녀가 쥐고 있던 광검의 아랫부분이 담뱃갑 밀려나오듯이 튀어나왔다. 한순간에 50cm 정도로 광검의 본체가 길어졌다. 소녀는 그것을 양손으로 쥐고는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차 광검에서 뿜어지는 빛줄기의 강도가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아까의 것이 빛의 검날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빛의 기둥이었다. 1m가량 되던 검날이 지금은 15m를 넘어섰다. 소녀는 그 광검을 양손 검처럼 쥐고서 허리를 크게 비틀었다.
“이런 상황엔 뭐라고 기술명이라도 외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다 선생님 탓이야.”
소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거대한 빛의 참격을 옆으로 휘둘렀다. 비틀린 허리에 집약되었던 힘이 한 번에 펼쳐졌다. 소녀의 검은 그렇게 주변의 전방위를 일순간에 베어버렸다. 그 모습은 가히 자연현상에도 비견할 수 있는 장엄한 모습이었다. 그 일격으로 그녀의 주변에 있던 모든 나무가 두부처럼 썰려서 소녀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갔다. 특히 소녀가 검격을 가속시킨 적병들이 있던 부분은, 검날의 길이가 추가로 두 배 정도로 길어졌었다. 빛의 검날은 빛의 기둥이 되었고, 빛의 기둥은 크게 휘둘러져 빛의 원이 되었다. 폭발과도 같은 그 일격에 모든 것이 베어졌다.
황혼의 빛이 흐리게 만든 눈을 비비고 바라본 그곳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소녀를 중심으로 오랜 나무들과 유적지의 돌로 된 조각 등등은 전부 다 일정한 높이에서 절단되어 있었다. 그 참격에 휘말린 적병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유지되던 경관을 일격으로 파괴한 소녀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방금의 그 일격으로 주변의 모든 인간의 기척이 사라지거나 무력화되었다. 소녀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살짝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에는 성취감도, 기쁨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끝을 모를 정신적 피로만이 있을 뿐이었다.
소녀의 손에 들린 광검의 검날은 어느 사이에 다시 원래의 1m 정도의 길이로 돌아와 있었다. 풀 드라이브 때문에 추가로 튀어나와 있던 부분도 다시 들어가 있었다. 소녀는 그 광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허공에 집어던진 후, 그것을 보지도 않고 다시 낚아챘다.
다시 소녀의 손에 잡힌 그것은 어느새 반으로 접혀서 넓적하고 네모난 패처럼 되어 있었다. 소녀는 그 패를 슬쩍 놓았다. 어느새 그 패는 소녀의 벨트와 은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슬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적당한 길이로 조절되었다.
소녀는 주변을 한번 돌아본 후, 귓가의 무전기에 손을 올렸다.
“…정리 끝. 부상병에게 들었겠지만 저격수의 제보가 있으니 주의할 것. 나는 그 저격수를 찾으러 갈 테니까 몸을 사려.”
하지만 무전기 저편에서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소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장?”
무전기 저편은 말 그대로 조용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의 숨소리는 들리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무전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때였다.
-까꿍!
갑작스러운 괴성이 무전기에서 들려왔다. 소녀는 깜짝 놀라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창가에서 졸고 있는데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떠민 느낌이랄까.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장난질에 소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떨렸다. 하지만, 소녀는 무전기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온 목소리의 정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소녀는 그 목소리가 원래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노는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분명 낯익은 목소리지만 원주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히히히히히! 혹시 놀랐나요? 아니 저도 이 무전기로 누가 말을 걸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장난을 친 것뿐이에요. 너무 화내지 말아주세요.
“장난치지 마! 넌 누구야?”
-우와, 그런데 이게 누구야. 이 듣는 것만으로도 발정해버릴 것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의 주인은 소드 윗치로군요! 너무너무 반갑습니다. 여전히 건강한 것 같아서 여기 이 우쿠 의사 선생님은 너무너무 기쁩니다.
소녀는 등 뒤로 오한이 달렸다. 무전기 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익숙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지 피에로의 느낌이 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 소녀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네크로멘서 닥터, 우쿠.
마도의 사생아. 미쳐버린 마술사이자 살인 의사. 무시무시한 능력을 갖춘 살인마이고, 일단 공식적인 직업은 살인 청부업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살인 의뢰를 하는 이는 무척이나 적었다. 청부비가 비싸서는 아니었다. 그저 우쿠와 연관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불행을 겪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우쿠의 손에 의해서.
네크로 닥터 우쿠와 소녀의 인연은 짧은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이미 그를 네 번 베어버린 경험이 있었다. 그럼에도, 자기가 언제 죽었냐는 듯이 불사신처럼 계속 되살아나는 이 자야말로 소녀가 가진 모든 악연들 중에서도 최악의 존재였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붉은 눈을 꽉 감아 버렸다.
“네가 거기엔 왜 있지? 너한테는 할 말 없으니까 전화 주인 바꿔.”
무전기 저편의 남자는 소녀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자신이 할 말만을 계속 해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인플루엔자 같은 것은 보통 몸조리만 잘하면 나아버리지만, 그래도 병원에 가면 빨리 낫잖아요? 그렇죠?
소녀는 정말 우쿠 의사 만큼은 절대로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나름대로 질긴 악연이다 보니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미친 사람이다. 소녀는 이를 악물면서도 그에게 조금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소녀는 억지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무리하게 친근한 느낌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물론 표정은 잔뜩 일그러진 상태였지만 말이다.
“휴우. …응. 그렇지. 근데 그게 왜?”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행운아들이에요! 우연히 마주친 착한 의사 선생님을 만났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빠르게 자신들의 병을 치유 받을 수 있었지요! 인술을 펼치는 정의의 무면허 의사!
소녀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탄식했다.
“아아, 알겠어. 다 죽였구나.”
-삶이란 질병 같은 거에요. 이 세상에서 살아 숨을 쉬는 모든 존재는 세계에 기생한 기생충이고, 그 기생충인 장본인들도 살아있다는 이유로 크게 고통받고 있어요! 아하, 괴로운 일이지요.
소녀는 이마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에 짓눌린 이마가, 마치 하얀 종이 위에 핏방울이 떨어지듯이 붉게 물들었다.
-제가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아가씨의 주치의인데도 아가씨의 병은 고쳐줄 수가 없다는 거에요.
“네 놈이 언제부터 내 주치의냐.”
-우리가 서로 만났다간, 또다시 그 빌어먹을 황혼의 마검 트와일라잇으로 이 불쌍하고 충실한 의사 선생님을 서걱서걱 썰어버리겠죠? 트와일라잇이라, 네 번이나 살해당하고 나니 외워지더군요! 제게 있어선 그 검광은 그야말로 황혼과 같으니, 정말로 절묘하다면 절묘한 이름이에요.
“잘 알고 있군.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이번엔 아주 갈기갈기 썰어줄 테니까. 다시 살아날 수 없어질 때까지 완전히 잘게 썰어주지.”
무전기 저편의 남자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유감입니다. 전 이미 유적 안이에요. 이 유적은 입구가 하나가 아니거든요. 몰랐죠?
소녀가 아이언 스태프에서 이곳으로 파견될 때, 그런 이야기는 조금도 듣지 못 했었다. 의도적으로 정보가 누락된 느낌이 들었다. 애초부터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이상했다. 이건 뭔가 아니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정말 싫은 기억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사신이라 불리게 된 일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소녀는 아이언 스태프의 정식 용병이자 특급 에이전트이지만, 그 전의 소녀는 윗치 스쿨이라는 학교의 학생이었다. 윗치 스쿨의 교훈은 ‘책상 위에서 마술은 완성되지 않는다.’였다. 그렇기 때문에 윗치 스쿨은 새내기 마녀들에게 현장의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서 종종 아이언 스태프에 보조 인원을 파견하곤 했다. 그 보조 인원은 대부분 졸업을 앞둔 마녀들이었지만, 어이없게도 언제부턴가 졸업을 하려면 앞으로도 까마득할 어린 나이의 그녀가 빠진 적이 없었다.
윗치 스쿨의 많은 사람이 소녀가 죽어버리길 원했다. 더군다나 아이언 스태프의 내부에도 그녀가 죽길 바라는 마녀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 덕분에 소녀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정식 에이전트도 아닌데도, 보통의 수습 파견은 투입 될 리가 없을 지옥으로 투입되었다. 더군다나 그 미션은 그야말로 함정 투성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그 과정에서 얻은 별명이 바로 사신이었다. 동료 용병들 입장에서 그녀가 끼어든 미션은 지옥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 지옥에서 그녀는 반드시 살아 남았으니 그렇게 불릴 만도 했다. 소녀에게 있어서 그 당시는, 정말 싫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소녀가 윗치 스쿨을 나오고서 아이언 스태프에 정식으로 입대한 후, 서서히 그녀를 사신이라 부르는 이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소녀가 소드 윗치라는 칭호를 얻은 이후로 동료 용병들에게 사신이라 불리운 적은 없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이래서야 사신재림이잖아…. 빌어먹을.”
소녀는 가까운 나무 밑동을 걷어찼다. 군데군데 아이언 플레이트로 강화된 육중한 부츠가 밑동의 한구석을 부숴버렸다. 소녀의 발은 임팩트 부츠의 충격 흡수 효과로 인해서 별반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그 대신 막 잘려나간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이 조금이지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소녀는 자신의 부츠에 끈끈하게 붙어오는 수액의 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화풀이가 전혀 안 되네.”
-화풀이가 필요하시다면 거기 있는 입구로 들어오세요! 전 유적 안에 있고, 입구에는 화풀이 대상도 기다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 임무도 완수하셔야 할 테니 일석삼조겠지요?
소녀는 애꿎은 나무 밑동을 향해서 계속해서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한 번의 발길질로 발길질의 충격을 흡수하고, 다음번의 발길질에 그 충격을 방출시켰다. 다시 다음 발길질로 흡수하고, 다음 발길질에 방출. 흡수, 방출, 흡수, 방출. 소녀가 계속해서 걷어차는 사이에, 그 나무 밑동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누가 지미닉의 허벅지를 갈겼나 했더니, 네놈의 인형이었군.”
-오, 노. 애니 간호사는 여기에 있어요? 애니 간호사, 소드 윗치에게 인사하세요.
무전기 너머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사리지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천사와 같았으나, 그 목소리가 이루는 억양은 어딘지 기계적인 느낌이 강했다.
-안녕하세요. 애니 간호사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아가씨. 저는 우쿠 의사 선생님 덕분에 무척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장난칠 생각 없으니 꺼져라 섹스 돌. 당장 그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우쿠 의사 선생님을 바꿔.”
소녀는 무전기 저편의 여성의 안부 인사를, 무언가를 씹는 듯한 어투로 험악하게 응대했다. 소녀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그 말을 들은 무전기 저편의 여성은 여전히 기계적인 어조로 말했다.
-네. 그럼 다시 선생님을 바꿔드리겠습니다. 다시 뵙게 될 그날까지 건강하시길 빌어요.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남성의 목소리가 나타났다. 그 목소리에는 과장된 흐느낌이 담겨있었다.
-저런, 나이도 어린 아가씨가 입에 담기엔 너무 심한 말이군요. 우쿠 의사 선생님은 너무 슬퍼요. 그런 경멸, 제가 받았으면 얼마나 기뻤을까요. 흑흑. 그러니까 제게도 뭔가 말해주지 않겠어요?
“이 자식….”
이를 가는 소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전기 저편의 남자는 다시 쾌활해져서 말했다.
-방금 지미닉 스켄브로이가 총에 맞았다고 하셨나요? 저런, 안되었군요. 하지만, 내가 한 것은 그저 신전 입구에 있을 저격수에게 조금 특별한 총탄을 제공한 것뿐입니다. 제가 최근 관심을 두던 분야가 무엇인지 혹시 알고 계신가요?
소녀는 완전히 박살난 나무 밑동을 뒤로하고 다음 밑동으로 향하며 말했다. 다음 밑동의 앞에 도착한 소녀는 그것을 향해서 아까와 같은 발길질을 시작했다.
“내가 알게 뭐야.”
-운명을 바꾸는 능력이에요! 그리고 그 탄환은 이 과정에서 나온 실험품이지요. 탄환에 부여된 의미는 ‘일격필살.’입니다.
“….”
일격필살이라는 말에, 소녀는 발길질을 멈추고 조용히 남자의 말을 경청했다.
-그게, 저는 탄환에 일격필살을 담으면 바로 급소로 날아가 맞을 줄 알았는데, 역시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해서 대충 쏴도 총알이 미사일처럼 퓽퓽 날아가는 건 안 되더군요. 하지만, 그 총탄에 맞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네, 죽지요. 언젠간 죽어요. 내가 그 총알에 원하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보통 사람도 언젠가는 죽을걸.”
-맞아요. 그래서 결과가 너무 시시한 탓에 바로 때려치웠습니다. 역시 제 연구 대상은 인간의 몸이 더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가끔은 기분 전환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럭저럭 재미있는 자극이 되었지요. 어쨌든 그 덕분에 외도는 끝냈습니다만, 조금은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아가씨가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누구나 언젠간 죽고, 그 총탄을 맞아도 누구나 언젠간 죽습니다. 다만, 그게 좀 더 빨리 죽게 되지요. 죽는 원인은 독도 상처도 아닙니다. 맞는 순간 대상에게 부여되는 운명입니다. 운명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어. 독은 해독하면 되고 상처는 치료하면 되지만, 운명은 피할 수 없어요!
우쿠는 언뜻 보면 미치광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도 미치광이였다. 다만, 미친 천재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하는 일은 너무나 방대했다. 때로는 살인 청부업자, 때로는 의사, 때로는 마술사, 때로는 광대, 때로는 과학자, 때로는 연금술사. 마도의 집약은 그들의 발전을 꾀어냈지만, 그 결과 우쿠 같은 미친 천재에게 방대한 능력을 부여하기도 했다.
먼 과거, 마도는 분열되어 있었다. 주술사와 의사, 마술사, 연금술사와 그 외에도 각지에 흩어진 토속 종교의 무당들과 지금은 짐작도 할 수 없는 태고의 비술을 간직하던 이들. 그들은 제각기 나름의 기술과 나름의 지식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들은 무척이나 폐쇄적으로 살아갔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의 특징상, 그 폐쇄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공개적으로 연구할 성질의 것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마치 운명처럼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이 어느 한 마술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되어졌다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 있던 섬이었다. 그 당시의 어떤 인간도 그곳에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태평양의 한가운데. 그 당시 인간의 항해술이라는 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마술사는 그곳에 갈 수 있었다.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에는 지구 각지로 통하는 워프 게이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 워프 게이트는 일방통행도 있었지만, 쌍방통행의 것도 있었다.
그 마술사는 일방통행의 게이트를 우연하게 발견해서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으로 오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각지를 게이트로 돌아다니며 세계를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그 마술사는 수없이 많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마도에 접근하던 이들과 조우했다. 문명의 여명이 아직은 희미하던 머나먼 옛날의 이야기였다.
그것을 계기로, 마도의 수상한 지식을 연구하고 사용하던 무리가 세계 각지에서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여행을 할 때 그들은 벌써 그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한순간에 도약한 것이다. 위대한 지식의 도서관이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모여들어서, 조금씩 서로가 가지고 있던 신비학을 교류하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세계 각지에 모래알처럼 흩어졌을 마도가 천천히 모여들게 된 것이다. 물론 폐쇄적인 그들이 지금처럼 마도협회를 구성하고, 탄탄하게 체계를 이루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 계기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겠다.
어쨌든, 저 우쿠야말로 그렇게 몰려들어 완성된 대부분의 마학에 모두 통달한 천재였다. 모든 마술과 지식의 전승이 세계 각지에 모래알처럼 퍼져서 폐쇄적으로 연구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마도의 부흥은 없었겠지만, 저런 악마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소녀는 믿기지 않는 우쿠의 연구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우쿠는 분명 미친 악당이긴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운명을 조종할 방법을 손에 넣고서, 그것이 자기가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던져버린 이 천재의 능력은 그야말로 경탄할만한 것이었다. 소녀는 나지막이 그것을 인정했다.
“우쿠, 넌 정말 천재야.”
-오호? 아가씨의 매도와 욕설도 상쾌하지만 칭찬을 들어버릴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물론 아가씨도 예뻐요, 착해요, 귀여워요, 똑똑해요! 가까이 있다면 언제나 사탕이라도 쥐여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하십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소녀는 무전기 저편의 남자가 퍼붓는 무수한 찬사에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 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같이 미친 놈에게 그 천재적인 머리는 위험해.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떼어내서 으깨줄테니까 거기서 목 씻고 기다려. 핵폐기물보다도 위험한 폐기물의 탄생이겠군.”
무전기 너머에서 남자가 장난스럽게 애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소녀는 자신의 귓가에서 무전기를 뽑아서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그 무전기를 세게 짓밟으며 임팩트 부츠에 충전된 모든 타격을 기폭 시켰다. 마치 우쿠 의사의 머리를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라도 하듯이.
# by | 2005/12/21 03:05 | 글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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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오버니삭스라니 저 죽습니다 ㅠㅠ
<-뭘 본거얏![..]
웬지 우크의 심정이 공감이 가려고하네요.. 위함한가 이건-_-;
소설 보다가 담배갑보고 피식. 좀 깨는 비유 아닌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