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유령金屬幽靈 -13- (Story 3, 산시)

금속유령金屬幽靈 -1- (프롤로그)
금속유령金屬幽靈 -2- (Story 1, 희누)
금속유령金屬幽靈 -3- (Story 1, 희누)
금속유령金屬幽靈 -4- (Story 1, 희누)
금속유령金屬幽靈 -5- (Story 1, 희누)
금속유령金屬幽靈 -6- (Story 1, 희누)
금속유령金屬幽靈 -7- (Story 2, 율령)
금속유령金屬幽靈 -8- (Story 2, 율령)
금속유령金屬幽靈 -9- (Story 2, 율령)
금속유령金屬幽靈 -10- (Story 2, 율령)
금속유령金屬幽靈 -11- (Story 3, 산시)
금속유령金屬幽靈 -12- (Story 3, 산시)




정크샵은 넓다. 그리고 일단 이것도 일단은 나름대로 장사라면 장사인지라, 보통은 손님이 안 오더라도 관리실을 누군가가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 덕분에, 나는 관리실 건물의 지붕이 안 보일 즈음에 뜀박질을 멈추는 여유를 지닐 수 있었다. 훗, 이것으로 땡땡이 성립이다. 뭐, 정 갑갑하면 희누나 나나 서로 산책하겠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상쾌할 정도로 보는 정면으로 뛰쳐나오고 보니 새삼스럽게 뭔가 득을 본 기분이다.

“땡땡이와 생명 보존을 동시에. 차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실로 마당 쓸고 동전 줍는 격이군. 이제 할 일은 동전 주인이 자기 동전을 잊어먹는 것을 기다리는 건가.”

역시 옛말은 멋져. 게다가 희누의 분노가 유지되는 시간은 이미 장시간에 걸친 실험으로 완전한 데이터가 산출되어 있는 상태다. 아무런 걱정도 없다. 게다가 땡땡이라고는 해도 정크샵 밖으로 나갈 이유는 굳이 없다. 정크샵 안쪽도 넓디 넓은데다가, 지금 밖으로 나가려고 정문을 통과하려 들었다간 원거리에서 스패너가 날아올 것이니, 이 안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 되는 거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에는 역시 골렘들 투성이다. 튜닝 된 놈, 안 된 놈, 부품 뽑힌 놈 놈 놈. 골렘은 좋은 부품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때에 녀석에게 맞는 부품이 가장 좋은 부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골렘의 파츠는 일단 쌓아두는 것 만으로도 언젠가는 도움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정크샵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보고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분명 이 세계는 까마득하게 넓고, 내가 아는 세계는 기껏 해봐야 더블 웨스트 근처로 한정되어 있지만, 이 정크샵을 무시할 수 있는 녀석이 세상천지에 있을까. 난 내가 일상과 더블 웨스트를 사랑하는 것 만큼 이 정크샵 역시 좋아한다. 그래, 좋은건 좋은거다. 좋고 사랑스러운걸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용한 이곳을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어딘지 무덤을 걷는 듯한 숙연함이 느껴진다. 무수한 과거의 잔해를 딛고, 지금의 나는 현실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공양 받지 못한 시체들은 이곳에 널려있다. 난 주변에서 잠자고 있는 골렘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여기에 있는 모든 골렘 파츠들로 골렘을 다 짜맞추면, 몇 대나 나올지 모르겠다. 일단 한 대의 튜닝된 골렘이 나오려면, 평균적으로 세대의 골렘 잔해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열대의 골렘 잔해가 있으면 대충 다섯 대는 넉넉히 뽑을 수 있다. 이건 일종의 공식이다. 재료가 많을수록, 재료 대 결과물의 효율은 올라간다. 물론 고성능을 추구하고, 특화된 부류의 결과물을 내려면 이런 저런 변수가 필요하지만, 보편적으로 저렇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정크샵에 있는 모든 잔해를 합치면 그 양은 얼마나 될까? 실로 까마득하군. 좀 새삼스럽지만, 그런 녀석들이 이곳에는 무수하게 많다.

이건 생각하기에 따라선 무척 두려운 일이다. 골렘은 분명 지금 이 시대에선 빠질 수 없는 인류의 동반자지만, 그 본질은 전투 병기 아닌가. 부디 앞으로도 이곳에서 편히 잠드시라. 네놈들이 전부 고쳐지고 일어날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구나. 이곳은 무덤으로 족하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일종의 무덤지기인 셈이다.

현 시대의 골렘은, 튜닝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간혹 진정으로 실력 있는 튜너는, 그들 사이에서도 네크로멘서라 불리우며 칭송받는다고 한다. 희누나 나는 이런 시골에 쳐박혀서 있는지라 그다지 관계 없는 칭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류의 명예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명성이 중요한 법이다.

어쨌든, 현 시대의 골렘들은 모두 시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멀쩡한 놈을 발굴해낸다고 해도, 그 놈은 시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인류의 에너지라면 역시 뭐니뭐니해도 마나다. 그리고 이 마나를 이용해서 출력을 얻는 장치를 마나 제너레이터라고 한다. 마나는 기본적으로 세상에 널리 퍼져서 자연 발생하는 에너지다. 그리고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 발생을 유도할 수 있다. 마나는 허공에 널리 퍼진 에너지이며, 제너레이터는 그것을 집약해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동력으로 치환한다.

현 인류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유물들에 마나 제너레이터가 있다. 이 마나 제너레이터는 현 인류가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현 시대의 기술로는 재현이 불가능하다. 현 인류가 만들 수 있는 마이너 마나 제너레이터는 끽 해야 소형의, 그것도 수시로 죽어버리는 질 낮은 녀석들 뿐이다. 애초의 마나 제너레이터는 무한 동력원이였지만, 이 시대엔 그 기술이 상실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죽은 마이너 마나 제너레이터를 재각성 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죽은 몬스터의 사체에서 발견되는 마나 코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 인류의 최대 숙제인 이 몬스터에게 얻을 수 있는 마나코어가 있다면, 현 인류는 부족한 기술력으로 재현시킨 마이너 마나 제너레이터로도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몬스터는 대 파괴에도 사라지지 않은 자동 공장에서 쏟아내는 지능형 파괴병기. 과거의 인류가 현재의 인류에게 남긴 ‘적’이다.

어쨌든 마나 코어란, 몬스터들이 지닌 생체 마나 제너레이터의 잔해이다. 몬스터가 죽으면 이 코어도 파괴되지만, 그 코어의 핵심에 있는 광석은 남는다. 이 광석을 연료로 사용해서 현 시대의 마이너 마나 제너레이터는 구동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가볍게 추리를 해볼 수 있다. 몬스터에게 있는 생체 마나 제너레이터도,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현 시대의 마나 제너레이터처럼 소모되고 멈추는 걸까? 아니다. 그들의 생체 마나 제너레이터는 무한 동력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호흡하고 살아가고 존재하는 한, 그 기관은 계속해서 몬스터에게 마나를 부여한다. 마치 과거의 메이저 마나 제너레이터처럼.

즉, 우리가 재현할 수 없는 구 시대의 진짜 마나제너레이터는 기계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진정한 마나 제너레이터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생체 부품이 필요한 것이다. 생체 부품은 마나를 만들어내는 것을 호흡처럼 사용해서 스스로를 보존시킨다. 호흡하는 생명과도 같다. 그들의 구동은 그들이 존재하기 위한 호흡 자체이고, 그들은 멈추면 특별한 보존처리를 받지 않는 한 질식해서 죽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구 문명의 잔해는, 대부분 전쟁 말엽의 대 파괴로 인해서 방치된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보존처리 되지 않은 생체부품은 전부 죽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 덕분에 현 시대에서 구 시대의 진정한 무한 동력원, 메이저 마나 제너레이터가 존재하는 곳은 쉘터 정도 뿐이다.

계속 사용되지 않거나, 보존처리 되지 않은 생체부품은 유지될 수 없다. 그래. 이건 골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과도한 발전과 개발로, 사용된 기술의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골렘은 애초부터 기계 뿐만이 아니라 생체, 마나의 요소까지 복합적으로 사용되던 물건들이다. 그저 일반적인 ‘기계’뿐이라면, 두 다리나 팔 따위 필요도 없다. 다리 대신 바퀴를 달면 되고, 하늘을 날아야 한다면 날개만 달면 그만이다. 하늘을 나는 기체에 팔다리가 왜 필요하겠는가. 땅을 달리는데 다리가 왜 필요하겠는가. 그 모든 것은 ‘인간’을 닮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인간을 닮음으로서 골렘은 성립된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을 닮기 위해서.’가 지금은 퇴색해서 그저 ‘인간을 닮은’이 되어버렸다. 물론 골렘의 성능을 올리기 위한 연구와 집착으로 인해, 애초에는 황당한 것이었을 인간형 기계 인형도 어느 정도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지금은 마나나 생체적인 작용이 전무한 기계껍질만으로도 튜닝을 거치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계만으로 만들어낸 철 인형이 뛰고 날고 할 수 있다고는 해도, 그건 결국 부수적인 것이다. 생체 부품이 기화되어 집약되던 마나회로가 파괴되어버린 지금의 골렘들은, 구 시대의 골렘들에 비하면 껍데기나 다름 없다. 두 바퀴가 사라진 삼륜차. 그게 현 시대의 골렘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퀴 하나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 튜닝이고,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자가 튜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대 파괴 이후 인류에게 새로 태어난 예술이 있다면 이 튜닝 뿐일 거라고 생각한다.

현 시대는 파괴에 의해 멸망했었고, 그 멸망을 가까스로 피해낸 소수의 인류가 다시 쌓아가고 있는 갓 태어난 신생아 같은 세계다. 하지만, 그 신생아에겐 이전의 성숙한 자신을 살해했던 유산이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 유산을 깨울 수 있는 것은 튜너들이다. 그래서 튜너에겐 책임이 붙는다. 그야말로 네크로멘서.

지금이야 과거의 전쟁으로 얻은 교훈이 아직 남아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인류는 분쟁과 싸움을 기피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그 교훈도 잊혀지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 파괴로 막을 내린 과거의 ‘전쟁’이후, 인류는 단 한번의 전쟁도 치루지 않았다. 치룰 능력이 없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인류의 뇌리에 분쟁과 멸망을 동일하게 여기는 교훈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전쟁’이 대 파괴로 막을 내린 과거의 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다시 평범한 일반 명사로서 사용될 날이 온다면?

튜너는 흔치 않다. 이 시대에서, 전쟁 파괴 무기였던 골렘들을 조립하고 깨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은 튜너들 뿐이다. 튜너는 적다. 그렇기 때문에 튜너는 자신의 튜닝에 기술 이외의 많은 것을 걸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주인 영감에게 배우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난 튜너다. 이곳에 널린 무수한 골렘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이 이들을 깨우려면 깨울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물론 나는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류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쉘터에서 있다가 막 황폐화된 대지로 올라온 인류에게 뭐가 있겠는가? 공사용 장비? 운송 장비?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그들에겐 오직 골렘뿐이었다. 인간은 골렘의 거대한 팔과 거대한 다리를 빌어서 지금의 문명을 다시 건축해낸 것이다. 인간과 꼭 닮은 그들이 아니었으면, 인류는 지금과 같은 삶을 복구해낼 수 없었다. 골렘은 인류에게 있어서 대지에 뿌려진 만나와도 같았다. 널리고 널린 축복. 힘. 문명. 지극히 불균형했지만, 그 불균형할 정도로 강력한 기술은 인류의 문명 회복 속도를 극도로 끌어올려 주었다.

그래. 그들 자신이 전쟁에 의해 멸망했음에도, 인류는 다시 전쟁 병기를 고치고 조작해서 다시 문명을 쌓는다. 마치 해변의 파도가 전달해준 바닷물로 모래성을 단단하게 다지는 행위와도 같다. 다시 파도가 몰려오면 쓸려버릴 모래성을. 이것이 운명인가.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주변의 금속 거인들에게 말했다.

“물론 너희들에겐 죄가 없지만.”

조용히 잠든 이들의 곁을 거닌다. 물론 내 말에 답하는 골렘은 한 대도 없었다. 그래, 저들은 죽은 이들이다. 나 같은 살아있는 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리가 없다. 그저 그들은 살아있는 이들을 지켜볼 뿐이다.

아아, 인류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멸망은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신생아 같은 지금의 인류에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 모두를 날려버릴 수 있는 파멸의 폭탄이 쥐어져 있다. 아직까지는 아이가 폭탄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을 말려줄 부모-과거의 멸망한 인류의 교훈이 있지만, 시간이 흘러서 아이가 부모를 잊는 순간이 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난 그 폭탄 중 하나를 찾아간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예의 컨테이너 앞에 서 있었다. 이 안에는 잠들었을 과거의 골렘이 있다. 보존 처리 없이 이런 컨테이너에 있었던 만큼, 기계로 된 부분 이외의 것은 전부 증발해버렸을 껍데기 뿐일 녀석이지만, 그것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척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난 왜 그 녀석에게 겁을 먹었던 걸까. 나는 경첩이 부숴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몇 번 여닫은 덕분인지, 전에 비해서 훨씬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지금의 나…. 아니, 요즘의 나는 조금 어딘지 이상하지 않나. 아니, 요즘이라 할 정도로 긴 시간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 놈을 만난 뒤부터 말이다. 난 자신도 모르게 나의 입가를 어루만졌다. 전혀 웃을 생각이 없는데도, 내 입술은 씁쓸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래, 난 지금 웃고 있다. 난 이렇게 웃을 수도 있는 인간이었나.

난 조용히 잠든 강철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부분 부분을 보면 둔탁하지만, 전체적인 조형은 날렵하다. 장갑부는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춘 듯한 어지러운 디자인. 그러면서도 그 통일감이 잘 짜여진 공예품을 보는 것 같다. 집어 던져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의, 그 자체로 완전한 완성품.

나는 완전히 열리지 않았던 컨테이너의 입구를 걷어 찼다. 쇳소리를 내면서 문이 활짝 열리고, 밝은 빛이 쏟아졌다. 그 빛을 받은 골렘의 안구가 빛났다. 그 빛이 어쩐지 눈동자 같고,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가가서 골렘을 툭 치면서 말했다.

“너, 혹시 나 알고 있냐.”

왜 난 이 녀석에게 이렇게나 동요하는 걸까. 분명 이 녀석은 특이하지만, 그 뿐이라면 그 뿐인데. 어차피 과거의 골렘은 생체 부품은 기화되고 짜여있던 마나 회로도 사라져 있을 터인데. 그래서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을텐데. 튜너의 손을 빌리지 않은, 방치된 골렘에겐 생명 따위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그런데도 어째서 난 이 녀석에게 이렇게나 존재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난 왜 이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는 금속 인형에 이리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그건 그것이 금속 인형이 아닌, 금속 유령이기 때문이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골렘에 기어오르고 있었다. 퍼즐 같은 장갑부를 차곡차곡 밟아 올라가며, 콕피트의 입구로 향했다. 상당한 완력과 감각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난 튜너다. 한창 튜닝 중이던 기름범벅 기체도 기어올라갈 수 있다. 쌓여있던 먼지 따위는 방해도 안 된다. 그래. 그 어느 것도 지금의 나에겐 방해도 안 된다. 이 마을도, 평온도 안정도 가족도 희누도, 나 자신도. 나는 또 다른 내가 알고 있는 멸망의 운명에 겁을 먹고 있으니까. 그 운명을 벗어나게 할 능력 따위, 지금의 나에겐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저 현 순간에 안주해서, 어차피 저버릴 한 순간의 봄날을 만끽하려는 거다.

나는 이 골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악의 저주. 이기심. 편의. 효율. 병기. 성능 이전의 문제다. 이건 존재 자체로 인류의 어둠을 대변한다. 자신이 만든 파멸에 스스로 멸망해버린 인류가 만든, 그들의 어리석음의 직계.

“이쿠로모담.”

난 퍼즐과 같은 장갑부에 교묘히 숨겨져 있는 게이트 스위치를 조작했다. 어차피 이런 순간적인 기억 따위, 몇분 뒤에는 다시 잊어버리겠지. 나는 열리고 있는 콕피트를 바라보며, 먼지투성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씁쓸한 일그러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 표정을 희누가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하지만, 물어보고 싶어도 희누는 여기엔 없다. 이곳에는 오직 나 혼자 뿐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쓴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이토록 쓴 웃음을 짓는 나야말로 다른 인간을 애타게 그리워한다.

그리고, 하얀 소녀는 그곳에 있었다.

지금의 ‘쓴 웃음을 짓는 나’도 경악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있을 수 없는 존재다.

지금의 그 어느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나지만, 눈 앞의 소녀는 분명히 내 이해의 범주를 초월한 것이었다. 이 소녀는 죽었어야만 했다. 1년에 걸쳐서 만들어지고, 2년의 교육을 받고, 1년 반 동안 전투를 벌이다가 마지막엔 하늘의 용을 살해하고 그 댓가로 스스로를 기화시켜야만 했다. 이 저주 받은 골렘, 이쿠로모담의 생체 부품으로서. 마나 회로로서.

하지만, 그녀는 분명 이 곳에 있었다. 하얀 소녀. 자신의 백색을 파일럿슈트로 포박당한 채, 이 죽음의 거인에 강제로 ‘탑재’되었어야 했던 슬픈 부품. 사라졌어야 했을 부품. 지금의 이 소녀가 여기에 있는 것은, 유령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 유령이다. 어딘지 그녀의 몸 뒤로 그녀가 앉아있는 시트가 비춰보인다. 반투명한 하얀 소녀에게, 사정없이 검은 콕피트가 투사된다.

나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색소 없는 혈액빛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 소녀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런 표정도 짓고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 얼굴을 살피던 소녀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은 나의 것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저 소녀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감정을 만들 수 없었기에, 끝없이 남의 감정을 흉내내던 소녀. 그래, 난 역시 쓴 웃음을 짓고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쓴 웃음을 짓는 나.’는 퇴장하도록 하자. 눈앞의 상대가 울면 이 소녀도 슬퍼하고, 눈앞의 상대가 살의를 띄면 이 소녀도 살인마가 된다. 그리고 아마도 눈앞의 상대가 웃으면, 아마 이 소녀도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저 거울처럼 따라하는 것 뿐일지라도.

그래, 난 쓴 웃음 말고는 지을 수 없다. 내가 정말로 웃을 수 있다면, 그건 ‘쓴 웃음을 짓는 나.’는 아니다. 나는 기적처럼 이 멸망의 세상에 다시 깨어난 이 소녀를 위해서 밝게 웃어줘야만 한다. 난 ‘쓴 웃음을 짓는 나.’가 아닌, 산시다. 역시 과거의 인간이 멸망할 운명이었다면, 지금의 인간에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멸망을 예상했지만, 이곳에 기적이 존재한다. 나는 확신을 잃었고, 그 대신 희망을 얻었다. 이 눈앞의 소녀는 나의 이해를 벗어난 존재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런 초월적인 무언가를 예상할 능력이 없었다. 나는 오만하지 않다.

뭐, 지금의 나에겐 어떻게 되든 상관 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난 산시가 아니니까.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뜨면, 나는 산시다. 비록 나는 여기서 다시 잠들지만, 앞으로 살아갈 너희 둘을 축복하겠어. 그러니 부디 너희들은, 서로를 잘 부탁한다.

나는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보는 하얀 소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Story 3, 산시 -Fin







金屬幽靈 -

by 달지않은고구마 | 2006/01/02 08:43 |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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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6/01/02 20: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달지않은고구마 at 2006/01/02 20:27
이리히//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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