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24일
[Revas] 프롤로그
지금은 군 복무 개시 중인 미트볼 이병님이(아니, 아직 훈련병인가요?) 적어둔 뎃글을 보고서 조금 뜯어고쳐 봤습니다.
전보단 볼만한 것 같은데, 나중에 또 보면 어떨런지.
아 거 그러게 이 살람들아 군대 좀 빨리 가지 왜 이리 다 느긋혀-_- 전역하고 나오면 아주 인간관계가 순백의 설원이 될지도 모르겠구만. 과장도 20%.
한 개인의 일상이 어느날 갑자기 짠 하고 바뀌어 버리는 일은, 그 장본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세상 곳곳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처녀의 결혼, 난데없는 배탈, 길거리이 튀어나온 돌부리, 그도 아니면 길 가다가 우연히 주운 지갑. 이렇게 사람들은 제 각기 나름의 일상을 지니고 있고, 그 일상은 그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 참으로 손쉽게 바뀔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일상이 바뀌더라도 자기 장본인만 바뀌지 않으면 결국에는 그 바뀌어진 일상 속에서도 언젠간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 완전히 익숙해질 무렵엔, 그 변화는 마치 익숙해진 신발처럼 적응한 후의 그에게는 어떠한 위화감도 주지 못하게 된다. 이르건 늦건, 그 때는 반드시 온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일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일상을 영유하던 나 자신은 분명히 변해버렸다. 뭐가 변해버렸냐고? 그다지 사상이나 특정 대상에 대한 관점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다. 뭐…. 병이라면 병이고, 다쳤다면 다친 거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후유."
난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멈추고 늘 마시던 모닝커피 대신에 우유를 컵에 따랐다. 찰랑찰랑하게 컵에 담긴 하얀 액체가 평소 즐겨 마시던 검갈색 액체 대신에 내게 문안을 올리고 있었다. 이곳은 젖소라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꽁지털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제국의 수도. 물론 이 희멀건한 우유는 그가 위치한 장소가 장소인 만큼 꽤 귀한 음료이다.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으면 금방 상해버리는 허약한 이 녀석을 상하지 않게 이 곳까지 운반해 오는데 투자되는 노력과 시간은 물론 예사의 것이 아니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나는 이 우유를 그대로 마시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커피에 넣기 위해서만 구해왔다. 그랬단 말이다. 원래 나의 기호품이나 취향, 사적인 취미등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런 만큼, 이 모닝커피 정도는 조금은 사치스러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난 아직도 모닝커피 없는 삶은 있는 삶에 비해서 변변치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 커피 대신에 이걸 처먹어야 하는 내 처지가 한스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는가. 지금의 나는 모닝커피보다도 ‘자라는 것’이 더 시급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밀크 스트레이트를 마셔야 한다. 왠지 그럴 것 같다. 그럴 것 같단 말이다. 아무래도 지금의 내 복잡한 머리통에 한기를 불어넣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이 허연 녀석을 치우고 원래의 고정 맴버를 모셔오는 편이 나을 것 같군. 하지만, 머리통이 청량해진다고 몸통이 불어나는 건 아니잖는가?
나는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거대함을 자랑하는 냉장고에 우유병을 처넣고, 역시 평소 보다 더 월등한 느낌의 스케일을 자랑하는 컵을 쏟지 않게 조심하며 돌아왔다. 아무래도 평소보다도 월등히 높아진 의자 위로 컵을 가지고 억지로 기어 올라가기보다는 그냥 침대에 앉는 편이 현명할 것 같았다. 그렇게 침대에 앉고 나니 손에 쥔 커다란 잔 안에서 넘실거리는 허연 녀석과 깨끗한 침대 시트가 번갈아가며 눈에 들어왔다. 쏟아버리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투덜 거릴 여유는 없었다. 지금의 내 손은 이 액체로 가득 찬 큼직한 맥주잔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나 위태하게 보이니까.
그렇게 해서 마침네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찬 우유의 맛은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지, 애초에 나쁜 맛이었다면 그딴 것을 커피에 타서 마셨겠냐. 이렇게 일단 잔이 비워져서 가벼워지고 나니, 마음이 좀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찬 우유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면서 복잡한 속을 어느정도 식혀준 덕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저기 저 찬장에 있는 술이 더 잘 해줄 것 같은데. 물론 이 시간에, 그것도 이런 몸으로 마시기 시작할 생각은 없지만.
마음을 다잡은 나는 비싼 유리 장식장 안에 도열한 술병들에서 눈을 돌리고는 입술을 햝았다. 역시 뭐랄까… 크게 불만스럽지는 않았지만 어린애다운 맛이 났다. 커다란 술잔에 입을 처박고 마신 덕분에 내 혓바닥만으로는 입가의 우유를 전부 거둬내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나는 입가에 묻은 우유를 대충 손으로 긁어냈다.
하아, 아무래도 이 꼴로는 출근도 못 하겠지. 기본적으로 난 먹물 건드리는 일은 별로 취향이 아닌 지라 그런 일들은 대부분 예전부터 다른 놈들에게 쪼개두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마스터 자리만큼은 쪼개지도 않았고 얌전히 잠자코 쪼개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어찌어찌 나에게까지 굴러오고 마는 큼지막한 결정 사항 몇가지 정도는 내 손으로 치워야만 한다. 얻는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노페인 노게인. 마침 최근에도 그런 녀석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빌어먹을. 회의장 한복판에 이런 꼬맹이가 내 자리에 앉아서 '입닥치고 일 하자 자식들아!'라고 지껄이면 모두 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거울을 바라보자, 내가 입고 잤던 것이 분명한 셔츠를 걸친, 조금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흑발의 어린 계집애가 이 쪽을 바라봤다. 거울 안의 소녀가 자신의 가슴을 더듬자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허전함이 내손에 잡혀졌다. 그다지 내 젖가슴에 특별한 애착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허전함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셈이 아닌가. 물론, 지금의 내게 사라져 버린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는 여전히 우유 냄새를 풍기는 귀여운 계집애가 귀엽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꽤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다. 어쩐지 신경질이 나서 거울을 향해 컵을 집어 던질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 컵 밑바닥에 조금 고여있는 우유를 발견하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 다 마셨다. 나잇값도 못하고 젖 빠는 젖먹이처럼 쪽쪽거리는 나 자신이 스스로 어이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의 내겐 한방울의 우유도 아쉬운 상황인 것 같은데.
그리고는 이번에야말로 텅 빈 것이 확인된 컵을 던저버리려고 했지만, 나는 또 다시 망설였다. 던지려는 모션을 취하자 필요 이상으로 헐렁한 소매가 허공에 휘둘러졌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가느다란 팔다리가 흘러내린 소매 밖으로 들어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갸련하기 짝이 없었다. 내 처지가 말이다.
얼른 다시 어른이 되고 싶다. 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한 시간 정도 안으로 안 될까. 나는 나 자신의 깜찍한 소망에 웃음 지었다. 정신은 육체의 장난감이라고 했던가. 몸이 어려지니 마음도 어려진 모양이다. 지금의 내 소망은 그야말로 어린아이다운 유치한 소망이었다.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깜찍하기도 하지. 내 방문에 누군가 노크를 한 것은 그렇게 그런 자신을 비웃고 있던 때였다. 나는 나무를 내리치는 작지 않은 소리에, 놀라기 보다는 짜증이 났다.
"뭐냐?"
"누님, 일어나셨습니까? 보고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목소리는 겡크스인가. 쌩 밑바닥 아랫 똘마니도 아닌 주제에 언제나 내가 일어나기 전에 준비한 브리핑을 아침마다 읊어주는 아주 고마운 일을 해주는 녀석이긴 한데, 아무래도 지금은 때가 별로 안 좋은 것 같다. 그딴 거나 듣고 있을 세가 없어. 애초부터 보고 받을 내용이랍시고 정리되는건 이미 내가 대부분 꿰고 있는 것이니까. 그 정도 재주도 없이 이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면 너무 뻔뻔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의식따위는 재껴버리고 싶었다. 이유는 너무 많아서 굳이 드는 것조차 바보스럽군.
"겡크스, 지금은 좀 곤란한데."
"예,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잠시 후' 정도로는 지금의 내 몸이 예전의 나처럼 쭉쭉빵빵해질 거라고는 생각 안 하는데. 나는 의논 구할 상대라도 찾듯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거울 속의 계집애랑 눈을 마주쳤다. 꽤나 곤란한 것 같은 표정이군. 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기해 할 때가 아니지. 어쨌든, 그 어두운 안색을 보니 마치 거울 속의 계집애는 몸이 어딘가 아픈 것 같았다. 아프다라, 그래. 꽤병이라도 부려볼까. 미봉책이긴 하지만 일단은 괜찮은 생각이다.
"겡크스, 오늘 난 모든 일을 멈추고 숼거다. 몸이 별로 안 좋아."
"생리라면 지난주에 끝나지 않으셨는지요?"
문 밖의 얼간이는 진지한 목소리로 처 맞을 소리를 지껄인다. 딴데서는 안 그러는 놈이 왜 내 앞에서는 저렇게 멍청할까. '용'이라는 별명이 아깝다.
"기어오르지 자 이 바보자식아."
어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멍청한 말을 물어오는 겡크스에게, 나 역시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문 밖의 겡크스는 잠시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하겠습니다."
"그래."
잠시 후 문 밖의 인기척이 천천히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녀석 정도 되는 놈이라면 지금의 내 목소리가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 쯤은 알 수 있겠지.
나는 완전하게 멀어진 겡크스의 기척을 확인하고는 빈 잔을 챙겨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려진 몸 덕분에 헐렁하게 흘러내려오는 팬티를 뒤로 차서 침대 위로 날려버렸다. 원래 잘 때에는 최대한 편하게만 입는 나이다 보니, 지금의 나는 셔츠 한장만 입은 셈이다. 마담으로서 어울리는 침실 복장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침실은 그저 쉬는 곳이다. 다른 사람들 처럼 조금 특별한 사교를 나누는 공간도 아니고, 그 외의 어떠한 공간도 아니다. 편한게 최고지. 나는 빈 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서 그 대신 그 위에 있던 검을 집었다. 평소 같으면 이 검을 집는 목적은 검에 있었겠지만, 지금 나의 목적은 검집에 둘둘 매여있는 가죽띠었다. 커피 대신 우유, 검 대신 가죽띠인가.
난 검이 매인 가죽띠를 질질 끌고서 평소보다 조금 높아진 의자 위로 조금 힘겹게 올라 앉았다. 일단은 이 크게 늘어진 소매자락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원래의 나에게도 조금 넉넉하던 셔츠가 지금의 내겐 그야말로 포대자루 같은 꼴이었다. 나는 검을 세워서 다리 사이에 기대고는 양 소매를 손목까지 걷어올렸다. 소매의 끝을 흘러내리지 않도록 잘 마무리 하고 풀린 단추를 전부 체운 후, 의자에서 일어나 검의 가죽띠를 허리 골반에 걸쳐지도록 매었다. 예전에도 나름대로 늘씬한 몸매였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가늘기가 나무장작 같구나. 이것으로 그나마 그럭저럭 복장이 완성되었다. 아랫도리가 조금 시원한게 마음에 걸리지만 내가 직접 들춰서 보여주지 않는 한 별 문제는 없겠지. 머리카락은 거의 본능적으로 땋아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이 다음에는 틀어올렸겠지만, 이런 꼬맹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니까 그만 두기로 했다. 가죽띠가 풀리니 혼자 남은 검이 멋대로 허공에 떠올라서 사라져버렸지만, 난 그 검이 그 자리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정신 산만해서 평소에는 매어두었지만, 지금처럼 몸이 작아지고 나면 실로 편리하기 짝이 없는 기능이다. 난 허공을 더듬어서 투명한 검집을 쓰다듬고는 거울속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대충 준비는 끝났다. 어딜 봐도 어색하고 이상한 복장이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비교적 길 잃은 몽유병 환자처럼 덜 보일 것이다. 이러고 나니 지금 이 처지가 의문 투성이긴 하지만, 최악의 최악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이로운 법이고, 나는 오늘 안으로 내 몸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아내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마음 먹었다.
문뜩 정신을 차려보니 거울속의 소녀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여전히 눈매는 예리하긴 했지만, 외모만큼은 아주 예쁜 계집애였다. 덤으로 예전의 나와 아주아주 닮아 있었다. 지금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였다면 그만큼 다행스러운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정말로 꿈이라면 그 꿈이 깨기 전에 지금의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은 녀석들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도 누님이라 부를 수 있는지 어디 한번 지켜봐주지. 아주 재미있을 거야.
거울 속의 나는 생긴 것에 맞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송별했다. 내 직업에 예전부터 종사하던 녀석들은 비밀통로를 만들어두는 습관이 있던 모양이지만, 난 그런 음험한 취미는 없다. 난 그냥 당당하게 문으로 걸어나갔다. 일단 마술사부터 찾아가볼까. 이런 이상한 짓거리는 그 놈들이 저지르곤 하는 이상한 짓거리랑 많이 비슷하니까 말이야. 그 다음은 약. 그 다음은 신전. 그 다음에는 내 길드 내부의 정보다. 명색이 정보 길드니까 뭔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겠지.
…아니, 일단 그 전에 옷부터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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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바보자식아' 라는 말을 듣고는 '무려 용이라는 거창한 별명을 지닌 겡크스 씨'는 승천함.
전보단 볼만한 것 같은데, 나중에 또 보면 어떨런지.
아 거 그러게 이 살람들아 군대 좀 빨리 가지 왜 이리 다 느긋혀-_- 전역하고 나오면 아주 인간관계가 순백의 설원이 될지도 모르겠구만. 과장도 20%.
한 개인의 일상이 어느날 갑자기 짠 하고 바뀌어 버리는 일은, 그 장본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세상 곳곳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처녀의 결혼, 난데없는 배탈, 길거리이 튀어나온 돌부리, 그도 아니면 길 가다가 우연히 주운 지갑. 이렇게 사람들은 제 각기 나름의 일상을 지니고 있고, 그 일상은 그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 참으로 손쉽게 바뀔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일상이 바뀌더라도 자기 장본인만 바뀌지 않으면 결국에는 그 바뀌어진 일상 속에서도 언젠간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 완전히 익숙해질 무렵엔, 그 변화는 마치 익숙해진 신발처럼 적응한 후의 그에게는 어떠한 위화감도 주지 못하게 된다. 이르건 늦건, 그 때는 반드시 온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일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일상을 영유하던 나 자신은 분명히 변해버렸다. 뭐가 변해버렸냐고? 그다지 사상이나 특정 대상에 대한 관점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다. 뭐…. 병이라면 병이고, 다쳤다면 다친 거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후유."
난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멈추고 늘 마시던 모닝커피 대신에 우유를 컵에 따랐다. 찰랑찰랑하게 컵에 담긴 하얀 액체가 평소 즐겨 마시던 검갈색 액체 대신에 내게 문안을 올리고 있었다. 이곳은 젖소라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꽁지털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제국의 수도. 물론 이 희멀건한 우유는 그가 위치한 장소가 장소인 만큼 꽤 귀한 음료이다.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으면 금방 상해버리는 허약한 이 녀석을 상하지 않게 이 곳까지 운반해 오는데 투자되는 노력과 시간은 물론 예사의 것이 아니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나는 이 우유를 그대로 마시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커피에 넣기 위해서만 구해왔다. 그랬단 말이다. 원래 나의 기호품이나 취향, 사적인 취미등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런 만큼, 이 모닝커피 정도는 조금은 사치스러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난 아직도 모닝커피 없는 삶은 있는 삶에 비해서 변변치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 커피 대신에 이걸 처먹어야 하는 내 처지가 한스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는가. 지금의 나는 모닝커피보다도 ‘자라는 것’이 더 시급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밀크 스트레이트를 마셔야 한다. 왠지 그럴 것 같다. 그럴 것 같단 말이다. 아무래도 지금의 내 복잡한 머리통에 한기를 불어넣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이 허연 녀석을 치우고 원래의 고정 맴버를 모셔오는 편이 나을 것 같군. 하지만, 머리통이 청량해진다고 몸통이 불어나는 건 아니잖는가?
나는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거대함을 자랑하는 냉장고에 우유병을 처넣고, 역시 평소 보다 더 월등한 느낌의 스케일을 자랑하는 컵을 쏟지 않게 조심하며 돌아왔다. 아무래도 평소보다도 월등히 높아진 의자 위로 컵을 가지고 억지로 기어 올라가기보다는 그냥 침대에 앉는 편이 현명할 것 같았다. 그렇게 침대에 앉고 나니 손에 쥔 커다란 잔 안에서 넘실거리는 허연 녀석과 깨끗한 침대 시트가 번갈아가며 눈에 들어왔다. 쏟아버리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투덜 거릴 여유는 없었다. 지금의 내 손은 이 액체로 가득 찬 큼직한 맥주잔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나 위태하게 보이니까.
그렇게 해서 마침네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찬 우유의 맛은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지, 애초에 나쁜 맛이었다면 그딴 것을 커피에 타서 마셨겠냐. 이렇게 일단 잔이 비워져서 가벼워지고 나니, 마음이 좀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찬 우유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면서 복잡한 속을 어느정도 식혀준 덕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저기 저 찬장에 있는 술이 더 잘 해줄 것 같은데. 물론 이 시간에, 그것도 이런 몸으로 마시기 시작할 생각은 없지만.
마음을 다잡은 나는 비싼 유리 장식장 안에 도열한 술병들에서 눈을 돌리고는 입술을 햝았다. 역시 뭐랄까… 크게 불만스럽지는 않았지만 어린애다운 맛이 났다. 커다란 술잔에 입을 처박고 마신 덕분에 내 혓바닥만으로는 입가의 우유를 전부 거둬내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나는 입가에 묻은 우유를 대충 손으로 긁어냈다.
하아, 아무래도 이 꼴로는 출근도 못 하겠지. 기본적으로 난 먹물 건드리는 일은 별로 취향이 아닌 지라 그런 일들은 대부분 예전부터 다른 놈들에게 쪼개두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마스터 자리만큼은 쪼개지도 않았고 얌전히 잠자코 쪼개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어찌어찌 나에게까지 굴러오고 마는 큼지막한 결정 사항 몇가지 정도는 내 손으로 치워야만 한다. 얻는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노페인 노게인. 마침 최근에도 그런 녀석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빌어먹을. 회의장 한복판에 이런 꼬맹이가 내 자리에 앉아서 '입닥치고 일 하자 자식들아!'라고 지껄이면 모두 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거울을 바라보자, 내가 입고 잤던 것이 분명한 셔츠를 걸친, 조금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흑발의 어린 계집애가 이 쪽을 바라봤다. 거울 안의 소녀가 자신의 가슴을 더듬자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허전함이 내손에 잡혀졌다. 그다지 내 젖가슴에 특별한 애착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허전함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셈이 아닌가. 물론, 지금의 내게 사라져 버린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는 여전히 우유 냄새를 풍기는 귀여운 계집애가 귀엽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꽤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다. 어쩐지 신경질이 나서 거울을 향해 컵을 집어 던질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 컵 밑바닥에 조금 고여있는 우유를 발견하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 다 마셨다. 나잇값도 못하고 젖 빠는 젖먹이처럼 쪽쪽거리는 나 자신이 스스로 어이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의 내겐 한방울의 우유도 아쉬운 상황인 것 같은데.
그리고는 이번에야말로 텅 빈 것이 확인된 컵을 던저버리려고 했지만, 나는 또 다시 망설였다. 던지려는 모션을 취하자 필요 이상으로 헐렁한 소매가 허공에 휘둘러졌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가느다란 팔다리가 흘러내린 소매 밖으로 들어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갸련하기 짝이 없었다. 내 처지가 말이다.
얼른 다시 어른이 되고 싶다. 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한 시간 정도 안으로 안 될까. 나는 나 자신의 깜찍한 소망에 웃음 지었다. 정신은 육체의 장난감이라고 했던가. 몸이 어려지니 마음도 어려진 모양이다. 지금의 내 소망은 그야말로 어린아이다운 유치한 소망이었다.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깜찍하기도 하지. 내 방문에 누군가 노크를 한 것은 그렇게 그런 자신을 비웃고 있던 때였다. 나는 나무를 내리치는 작지 않은 소리에, 놀라기 보다는 짜증이 났다.
"뭐냐?"
"누님, 일어나셨습니까? 보고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목소리는 겡크스인가. 쌩 밑바닥 아랫 똘마니도 아닌 주제에 언제나 내가 일어나기 전에 준비한 브리핑을 아침마다 읊어주는 아주 고마운 일을 해주는 녀석이긴 한데, 아무래도 지금은 때가 별로 안 좋은 것 같다. 그딴 거나 듣고 있을 세가 없어. 애초부터 보고 받을 내용이랍시고 정리되는건 이미 내가 대부분 꿰고 있는 것이니까. 그 정도 재주도 없이 이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면 너무 뻔뻔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의식따위는 재껴버리고 싶었다. 이유는 너무 많아서 굳이 드는 것조차 바보스럽군.
"겡크스, 지금은 좀 곤란한데."
"예,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잠시 후' 정도로는 지금의 내 몸이 예전의 나처럼 쭉쭉빵빵해질 거라고는 생각 안 하는데. 나는 의논 구할 상대라도 찾듯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거울 속의 계집애랑 눈을 마주쳤다. 꽤나 곤란한 것 같은 표정이군. 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기해 할 때가 아니지. 어쨌든, 그 어두운 안색을 보니 마치 거울 속의 계집애는 몸이 어딘가 아픈 것 같았다. 아프다라, 그래. 꽤병이라도 부려볼까. 미봉책이긴 하지만 일단은 괜찮은 생각이다.
"겡크스, 오늘 난 모든 일을 멈추고 숼거다. 몸이 별로 안 좋아."
"생리라면 지난주에 끝나지 않으셨는지요?"
문 밖의 얼간이는 진지한 목소리로 처 맞을 소리를 지껄인다. 딴데서는 안 그러는 놈이 왜 내 앞에서는 저렇게 멍청할까. '용'이라는 별명이 아깝다.
"기어오르지 자 이 바보자식아."
어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멍청한 말을 물어오는 겡크스에게, 나 역시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문 밖의 겡크스는 잠시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하겠습니다."
"그래."
잠시 후 문 밖의 인기척이 천천히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녀석 정도 되는 놈이라면 지금의 내 목소리가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 쯤은 알 수 있겠지.
나는 완전하게 멀어진 겡크스의 기척을 확인하고는 빈 잔을 챙겨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려진 몸 덕분에 헐렁하게 흘러내려오는 팬티를 뒤로 차서 침대 위로 날려버렸다. 원래 잘 때에는 최대한 편하게만 입는 나이다 보니, 지금의 나는 셔츠 한장만 입은 셈이다. 마담으로서 어울리는 침실 복장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침실은 그저 쉬는 곳이다. 다른 사람들 처럼 조금 특별한 사교를 나누는 공간도 아니고, 그 외의 어떠한 공간도 아니다. 편한게 최고지. 나는 빈 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서 그 대신 그 위에 있던 검을 집었다. 평소 같으면 이 검을 집는 목적은 검에 있었겠지만, 지금 나의 목적은 검집에 둘둘 매여있는 가죽띠었다. 커피 대신 우유, 검 대신 가죽띠인가.
난 검이 매인 가죽띠를 질질 끌고서 평소보다 조금 높아진 의자 위로 조금 힘겹게 올라 앉았다. 일단은 이 크게 늘어진 소매자락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원래의 나에게도 조금 넉넉하던 셔츠가 지금의 내겐 그야말로 포대자루 같은 꼴이었다. 나는 검을 세워서 다리 사이에 기대고는 양 소매를 손목까지 걷어올렸다. 소매의 끝을 흘러내리지 않도록 잘 마무리 하고 풀린 단추를 전부 체운 후, 의자에서 일어나 검의 가죽띠를 허리 골반에 걸쳐지도록 매었다. 예전에도 나름대로 늘씬한 몸매였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가늘기가 나무장작 같구나. 이것으로 그나마 그럭저럭 복장이 완성되었다. 아랫도리가 조금 시원한게 마음에 걸리지만 내가 직접 들춰서 보여주지 않는 한 별 문제는 없겠지. 머리카락은 거의 본능적으로 땋아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이 다음에는 틀어올렸겠지만, 이런 꼬맹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니까 그만 두기로 했다. 가죽띠가 풀리니 혼자 남은 검이 멋대로 허공에 떠올라서 사라져버렸지만, 난 그 검이 그 자리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정신 산만해서 평소에는 매어두었지만, 지금처럼 몸이 작아지고 나면 실로 편리하기 짝이 없는 기능이다. 난 허공을 더듬어서 투명한 검집을 쓰다듬고는 거울속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대충 준비는 끝났다. 어딜 봐도 어색하고 이상한 복장이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비교적 길 잃은 몽유병 환자처럼 덜 보일 것이다. 이러고 나니 지금 이 처지가 의문 투성이긴 하지만, 최악의 최악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이로운 법이고, 나는 오늘 안으로 내 몸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아내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마음 먹었다.
문뜩 정신을 차려보니 거울속의 소녀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여전히 눈매는 예리하긴 했지만, 외모만큼은 아주 예쁜 계집애였다. 덤으로 예전의 나와 아주아주 닮아 있었다. 지금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였다면 그만큼 다행스러운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정말로 꿈이라면 그 꿈이 깨기 전에 지금의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은 녀석들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도 누님이라 부를 수 있는지 어디 한번 지켜봐주지. 아주 재미있을 거야.
거울 속의 나는 생긴 것에 맞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송별했다. 내 직업에 예전부터 종사하던 녀석들은 비밀통로를 만들어두는 습관이 있던 모양이지만, 난 그런 음험한 취미는 없다. 난 그냥 당당하게 문으로 걸어나갔다. 일단 마술사부터 찾아가볼까. 이런 이상한 짓거리는 그 놈들이 저지르곤 하는 이상한 짓거리랑 많이 비슷하니까 말이야. 그 다음은 약. 그 다음은 신전. 그 다음에는 내 길드 내부의 정보다. 명색이 정보 길드니까 뭔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겠지.
…아니, 일단 그 전에 옷부터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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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바보자식아' 라는 말을 듣고는 '무려 용이라는 거창한 별명을 지닌 겡크스 씨'는 승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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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6/12/24 09:36 | 글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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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리플을 다는 이유는.. 제 블로그 와서 소설 좀 까달라는 거.. 바로 그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