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06일
[영원의 밤][단편] 장기대국
복귀 기념작. 군대크리로 굳어버린 뇌가 어느정도 꿈틀거릴런지 매우 회의적이지만, 이렇게라도 워밍업을 해줘야죠.
한규는 눈 앞에 앉은 소녀의 지나치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며, 자신이 실수 한 것은 아니였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소녀의 눈은 무기력하던 이전과는 달리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장기판 위의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열성적인 집중력 덕분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버린 그녀의 스커트는 어느새 슬금슬금 올라가서 하얀 허벅지를 들어내고 있었다. 양반다리와 살짝 미동하는 한쪽 다리는 스커트의 상승폭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었다.
"강적이다..."
"응."
"아니야. 제발 빨리 두기나 해."
"응."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응."
한탄 하듯이 내뱉은 한규의 말에 비해서 소녀의 말은 짧디 짧았다. 제대로 듣고나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소녀의 이름은 녹티스. 며칠 전부터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한규의 집에 신세지게 된 식객이었다. 물론 한규와 녹티스의 인연은 이렇게 짧게 설명하기엔 부연할게 너무나 많았지만, 지금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한규의 눈 앞에 있는 녹티스가 여러 의미로 매우 강하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녹티스는 자신이 장기를 처음 둔다고 했다. 그랬는데. 녹티스는 여김없이 한규가 가장 우려하던 기물(장기말)을 들어서 가장 염려되는 위치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면 4턴 후에 한규가 곤란해진다. 어쩔 수 없이 현재 세워둔 계획은 취소하는 수밖에 없다. 녹티스의 장기 운용은 엄청나게 느렸고, 한편으론 한방 한방 치명적이기 그지 없었다.
한규는 명색이 학교 장기부 부장이었다. 암만 보통 사람의 범주를 지나치게 뛰어넘는 이 소녀라 해도, 생전 처음 장기를 두면서 이렇게까지 그를 궁지에 몰아넣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한규는 명실공히 학교 장기부 내에서 최강의 실력자. 이렇게 고전할 수는 없었다. 일단 문제되는 것은 실력만이 아니었다. 도무지 눈을 장기판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아까 언급한 흔들리는 하얀 허벅지 말고도 어지럽게 장기판 위를 오가며 이 기물 저 기물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작고 하얀 손가락이라던가, 아까부터 유심히 처다보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장기판만 바라보고 있는 무방비한 얼굴. 그 어느것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한규에게 위협적이었다. 한규는 깎여나가는 전의를 일부러 채찍질하며 혼신의 힘을 다 해서 장기판에 신경을 집중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고나니 이번에는 또 녹티스의 길고 긴 시간끌기가 괴로워진다. 마침 녹티스가 하나의 기물을 쥐었다가 다시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요."
"나? 여기 있잖아."
"...응, 나도 알아. 그러니까 어서 두세요."
갑자기 장기판만 바라보던 녹티스가 눈살을 확 찌푸리며 한규를 올려봤다. 그녀의 얼굴 각도상 그대로 노려보는 눈이 되어버리는지라, 한규는 조금 어깨를 움츠렸다. 녹티스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한규에게 따졌다.
"잠깐, 아까부터 너무 재촉하는거 아니야? 난 초보자잖아."
하지만, 초보자인 주제에 녹티스가 두는 한수 한수는 매섭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방을 이토록 초조하게 만드는 시간 끌기, 그리고 눈을 현혹해서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행동과 외모. 한규는 거의 애원하는 태도가 되어서 이 모든 것을 녹티스에게 하소연했다. 잠시 장기 두기를 멈추고 한규의 하소연을 들은 녹티스는 모든 것을 한번에 정리해버렸다.
"그러니까 지금 내 허벅지를 처다보느라 장기 둘 정신이 없다는 말이네?"
"어떻게 그런 부분만 추려서 듣냐."
사람을 한 순간에 매도해버리다니. 하지만, 녹티스의 표정은 별로 한규에 대한 경멸이나 혐오를 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올라가는 입매. 내려 앉는 속눈썹. 녹티스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사악하게.
"후후후, 그렇다면 이 전투는 내가 이겼네. 내 스커트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내 승률은 올라간다는 말이잖아."
"악마냐."
"아무리 내가 이 동양 체스를 처음 둔다고 해도, 서양 체스라면 나도 나름대로 각종 수라장을 거쳐 온 사람이란 말이지. 내가 진다는 것은, 지금껏 내게 패배했던 모든 패자들도 나와 함께 져버린다는 말이 된다고. 모두를 위해서라도 나는 질 수 없어."
"나름대로 의도는 좋은데 수단이 터무니 없이 잘못 되었잖아."
고로 좋은 결과가 나올 리는 없다. 이건 세상의 법칙이자 진리다. 그런데 그 순간 녹티스는 갑자기 포를 들어서 이 쪽의 허를 찔러왔다. 여전히 매서운 수였지만, 두는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승리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가.
"체크!"
"있잖아, 장기에서는 체크가 아닌 장군이라고 해."
"상관 없잖아."
녹티스는 마치 어린 소녀가 투정이라도 부리듯, 여전히 양반다리를 한 채로 다리를 더욱 흔들었다. 한규는 팔락팔락 올라가는 스커트로 향하는 눈을 어떻게든 장기판 위로 붙들어야 했다. 한규가 자신의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악마. 악마. 악마."
녹티스는 그런 중얼거림을 완전히 무시한 채, 멋들어진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기왕이면 승부사라고 불러줄래?"
한규는 그렇게 불러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규는 이를 악물고선 말했다.
"아니, 기왕 부를 거라면 마녀라고 불러줄 거다."
확실히 이건 효과가 있었다. 흔들리던 다리가 딱 멈춘 것이다. 방금까지는 묘하게 흩어지고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던 녹티스가, 마치 칼집에서 뽑힌 한 자루의 검처럼 순식간에 기세를 갈무리해 버렸다.
"...알면서 그렇게 부른 거지?"
"물론이지."
한규는 유연하게 웃으며 어깨까지 으쓱했다. 명백한 도발. 아이언 스테프의 검이자 원류 살해자, 검의 마녀 소드윗치 녹티스에게 장기부 부장은 망설임없이 거듭 도발을 먹였다.
"이래뵈도 이 몸은 학교 장기부의 부장이라고. 너 같은 초보자에, 너 같은 2차 성징조차 제대로 오지 않은 여린 몸뚱이를 가진 계집애가 아무리 모자란 색기를 흘리고 비열하게 시간을 끌고 온갖가지 심리전을 걸어온다고 해도 애초부터 내 상대가 될 리가 없잖아? 조금 맞장구 처 준 것 가지고 너무 기세가 오르는 것 같아서 눈꼴시군. 하하하."
"패배의 수치심에 그 입을 평생 다물게 해주지."
"해봐라 마녀."
"죽여주마."
녹티스는 한규의 왕을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며 선언했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무섭긴 했지만, 이쪽이 아까보단 차라리 상대하기 편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쪽이 딴 생각 할 겨를이 없이 긴장이 되어서 한규에게 유리했다. 한규는 생각했다. 온갖 수라장을 겪으며 고생고생 자라난 녹티스에 비하면 나는 온실속의 화초같은 인간인지라, 이 정도로 무서운 맹수가 죽일듯이 쫒아오지 않으면 전력 질주 할 기분이 나지 않으니까 이 정도가 딱 좋다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두 사람은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공방을 주고 받았다. 몇번의 공방으로 전장의 상황은 급진전을 겪었다. 녹티스가 다시 한 수를 놓자, 한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장기말을 들었다. 녹티스의 수는 상을 먹으면 포로 마주 먹겠다는 도발에 가까운 수였지만 한규는 일부러 받아주기로 했다. 한규가 말을 놓자마자 녹티스도 거의 바로 포를 움직였다. 확실히 아까보다 진행이 빨라진 것이다. 한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로 졸을 움직여서 포의 후퇴로를 막았다. 전개가 빨라지다보니, 아직 경험이 부족한 녹티스가 실수를 한 것이리라. 녹티스는 이를 갈듯이 말했다.
"크, 진짜 할 줄이야."
"후후, 말을 너무 아끼는거 아니야? 무엇보다도 체스의 폰과는 다르게 장기의 졸은 은근히 강하다고."
하지만, 녹티스는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천만에. 실수한 건 오히려 너잖아. 나는 네가 이렇게 움직여줘서 너무 고마운거 있지."
녹티스는 갈 곳이 없으리라 생각하던 포를 움직여서 노골적으로 차를 노리는 위치로 이동시켰다. 포를 버릴 생각인가? 자살에 가까운 수였다. 대체 뭘 노리는 거지? 한규는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아주 잠깐 진행이 늦춰졌고, 그때 녹티스가 한규에게 말했다.
"허어,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대체 누가 누구에게 저런 말을! 한규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서 바로 졸을 움직여서 포를 먹어버렸다. 그러자 그 졸이 움직이느라 엄호할 수 없게 되어버린 다른 졸을 녹티스의 상이 먹어버렸다. 그러면서 절묘한 각도로 한규의 장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표정이 되어버린 한규에게 녹티스가 외쳤다.
"체크!"
"장기에서는 장군이라니까! 어쨌든 멍군."
한규는 왕의 호위인 사를 움직여서 상의 궤적을 막아섰다. 아직은 수습할 수 있었다. 외통수 없이 장군만 치는건 의미가 없다. 허를 조금 찔리긴 했지만,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 한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녹티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이겼다."
"...뭐?"
"아, 재미있었다. 이제 날 이기려면 10년은 수련하고 오세요 장기부 부장님. 그리고 내가 이겼으니까 오늘 저녁은 맛있는걸로 부탁해."
녹티스는 그대로 들이 눕더니, 뒹굴뒹굴 굴러서 옆으로 퇴장해버렸다. 붕대인지 리본인지 알 수 없는 흰색 천으로 묶어둔 검은 머리카락이 휙휙 빙글빙글 흔들리며 멀어졌다. 한규는 앉아서 그저 장기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
생각 해 본 결과, 장기판 위의 현제 형세에 따르면 3수 후 나는 외통수를 피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태도가 진지해지면 강해지는 것은 녹티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한규는 한숨을 쉬면서 상대방이 자리를 비운 장기판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규는 장기판을 엎어버렸다. 장기말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와르르 울렸다. 한규가 말했다.
"녹티스, 안 가르쳐준 장기 규칙 하나 더. 승부가 끝나기 전에 장기판을 엎어버리면 그 판은 무효야."
데굴데굴 굴러서 TV 앞에 누워있던 녹티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말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게 맞았다. 하지만, 스승인 내가 그런다는데 어쩔거냐. 한규는 겉과 속이 다른 웃음을 지으며 녹티스에게 말했다.
"자신이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면 장기판을 지켰어야지. 후후, 장기를 두다 말고 자리를 비운 너의 패배다."
엄연히 말하면, 한규 말이 맞다 하더라도 무효인 이상 게임은 비긴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는 대충 입 밖으로 나오는대로 주워 섬겼다. 녹티스는 한규에게 장기말을 집어 던졌다. 한규는 자신의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진심으로 분해하는 녹티스의 공격을 가볍게 맞아주며, 그대로 집 거실에 누워버렸다. 녹티스는 어느세 장기판을 다시 정리해서 다시 싸우자고 덤벼들었지만, 한규는 눈을 감고서 가만히 있었다. 한규는 적어도 한동안은 절대로 녹티스와 장기 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앞으로 한규가 녹티스와 다시 장기를 두게 될 거라면 한 판이라도 이길 수 있을까. 자신이 불리하면 바로 판을 엎겠다고 난동을 부릴텐데 말이다. 아이언 스테프의 검. 원류 살해자. 소드윗치 녹티스가 장기판을 엎자고 나서시면 일개 장기부 부장으로서는 엎어져야지 별 수 있을까. 한규는 그를 마구 흔드는 녹티스의 손길을 눈 감고 무시하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문뜩 고개를 들어서 시계를 보니, 벌써 바깥 풍경은 어두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성난 녹티스는 달래기 위해서라도, 오늘의 저녁식사는 최대한 호화스럽고 빠르게 대령하는 편이 이로울 것 같다고 한규는 생각했다. 한규가 누운 채로 눈을 들어서 저만치 굴러가 있는 장기말이 눈에 띄었다. 장기말 한 가운데의 한자를 바라보며 한규는 생각했다. 오늘은 큰맘 먹고 탕수육이라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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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2/06 12:13 | 글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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